1995년 영국 런던 내셔널 갤러리의 보존연구지에는 ‘겐트 제단화’와 함께 얀 반 에이크(Jan Van Eyck)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아르놀피니의 언약식’에 대한 적외선 조사결과가 발표되었다.
가장 관심을 끈 것은 아르놀피니 부부의 얼굴에 대한 수정 흔적이다. 특히 아르놀피니의 얼굴은 두 사람의 얼굴이 겹쳐 있는 모습이어서 마치 유령을 보는 것처럼 섬뜩한 느낌을 준다. 손과 발의 위치도 여러 번 수정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적외선 리프렉토그램이라는 과학조사장비를 통해 밝혀졌다. 원리는 적외선이 두껍지 않은 물감층이나 바니스층을 투과할 수 있는 특성을 이용한 것이다. 그림에 적외선을 비추면 물감층을 투과하여 그 밑에 있는 드로잉의 재료로 사용된 연필이나 검정 물감이 흡수하게 되고, 이것을 특수 카메라로 촬영하여 이와 같은 영상을 얻을 수 있다. 대중이 명작에서 이러한 수정 흔적을 보는 것은 신기하고 흥미로운 일이지만 보존 전문가나 미술사가에게도 작가의 기법과 최초의 의도를 연구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된다.
조사 결과를 보면 반 에이크처럼 당대 최고의 화가도 실수로 작품을 수정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초기 플랑드르 유화 기법을 이해한다면 주인공의 얼굴을 바꾸는 이러한 중대한 실수에는 의문이 남는다. 당시 반 에이크가 구사한 유화 기법은 완벽하게 드로잉을 한 후 색을 올리는 방식이다.
이는 유화의 바로 전 단계인 템페라의 제작 방식이기도 하다. 달걀의 노른자 등을 안료와 섞어 그리는 템페라의 가장 큰 약점은 혼색이나 덧칠을 하면 탁해지고 지저분해진다는 것이다. 때문에 템페라 화가들은 수련 단계부터 세심하고 정확한 드로잉을 한 후에 물감을 실수 없이 칠하도록 철저하게 교육받았다. 반 에이크도 이를 충분히 습득하였다. 유화는 여러 번 덧그려도 그림의 느낌이 달라지지 않지만 템페라 기법에 익숙했던 작가들은 정확한 드로잉에 의거한 그림을 그렸던 것이다.
그런데 반 에이크가 주인공 얼굴을 대대적으로 수정한 것을 보면 단순한 실수가 아니라 혹 다른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상상해 본다. 옷차림만 봐도 대단한 지위와 부를 가진 주인공이 혹 수정을 요청한 것은 아닐까? 아르놀피니의 모습을 보면 가뜩이나 어깨는 좁고 얼굴이 몸에 비해 큰 데다 원래 드로잉에는 심한 매부리코에 눈도 이마 쪽으로 몰려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반 에이크는 이를 충실히 담아냈으나 결과물에 대한 만족도는 전적으로 그림을 주문한 사람의 몫. 화가의 지위라는 것이 재주 많은 장인으로 취급받던 시절이라 얼굴을 수정해달라는 화주의 요청을 감히 거역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