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꿈 CUM] 복음의 길 _ 제주 이시돌 피정 (5)
기도는 때로 매우 정적이고, 소극적인 행동으로 판단되어, 거의 휴식에 가까운 의미로 이해되기도 합니다. 또 기도는 같은 단어를 반복적으로 사용하는 활동이며, 끝임 없이 계속되는 낭송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기도가 공동 전례 안에서 행해질 때에는, 혼란을 피하기 위해 이미 합의되어 정해진 형식과 순서를 따릅니다.
종교 지도자들이 사람들에게 기도를 가르칠 때, 누군가가 이미 작성한 기도문을 알려줍니다. 그런데 그런 기도문은 사람들이 갈구하는 영적, 심리적 상황과 무관한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기도의 어떤 고정된 형식에서 벗어나 묵상이나 관상으로 방향을 바꾼다 하더라도, 기도는 조용히 자신을 성찰하는 그런 체험으로 여겨집니다. 확실히 사람들은 기도를 몸부림치거나 내적투쟁의 시간으로 여기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기도 안에서 엄첨난 내적 갈등을 겪을 수 있습니다.
오랫동안 저는 어리석게도 기도를 함으로써 좋은 사람이 되고 또 하느님께 잘해드리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느님께 제 귀중한 시간을 기도를 통해 바침으로써 전 꽤 괜찮은 사람이라 느끼곤 했습니다. 제가 봉헌했던 많은 미사에 대해서도 사제로서 자부심을 가졌습니다. 하지만 참으로 부끄럽게도, 하느님은 제 기도 없이도 아주 잘 계실 수 있다는 너무도 당연한 사실을 최근에야 겨우 깨달았습니다. 정반대로 기도와 전례는 나를 위해서 좋은 것이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무언가를 청하는 기도를 할 때, 하느님께서 그들이 원하는 것을 들어주지 않으면 원망합니다. 또한, 무의식적으로 청함과 동시에 그 결과를 상상하면서, 하느님은 그것을 들어주어야만 한다는 태도를 갖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위해 노력을 했기 때문에 당연히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이런 태도는 누가 창조주이고 누가 피조물인지를 바꿔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체험은 하느님 앞에서 우리 자신의 인간적 모습을 모두 드러낼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합니다. 즉, 실망과 원망의 체험은 우리의 헛된 욕망과 이기심을 밝힐 수 있는 중요한 도구가 되며, 이 성찰은 신에 대한 깊은 인식으로 우리를 이끕니다. 올바른 관계를 맺는 데 가장 큰 도움이 됩니다.
예수는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기도하였고 또 어떤 때는 홀로 했습니다. 그는 안식일에 회당에서 그 공동체와 함께 성경을 묵상하였고 하느님 말씀을 들었습니다. 여기서 하느님 말씀을 듣는 행동은 기도의 가장 필수적인 부분입니다.
예수는 제자들이 기도의 방법을 요청하기 전까지는,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에 대해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예수가 홀로 기도한 후에 그 기도가 어떤 것이었든 큰 도움이 된다는 것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예수는 기도할 때, 많은 말들이 필요하지 않다는 점을 강조하였습니다. 또 우리에게 가르쳐준 기도 속에서, 기도의 중심은 우리가 아니라 하느님이었습니다.
<다음호에 계속 >
글 _ 이어돈 신부 (Michael Riordan, 성 골롬반 외방 선교회, 제주교구 금악본당 주임, 성 이시돌 피정의 집 담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