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리코에서 눈먼 걸인이 예수님을 만나 시력을 되찾고 그분을 따라갔다는 마르코 복음서의 마지막 기적 이야기가 오늘의 말씀입니다.
길가에 앉아 구걸하던 바르티매오는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는 소리를 듣고 “다윗의 자손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마르 10,47)라고 외쳤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었지만 용기를 내어 더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그는 남을 탓하지 않았고 다른 이들의 방해에도 개의치 않고 적극적으로 예수님을 향한 기대와 믿음을 행동으로 드러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외침을 들으시고 걸음을 멈추었고 그를 가까이 불러오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부르신다고 하자 그는 단 하나뿐인 자신의 소유물인 겉옷을 벗어 던지고 벌떡 일어나 예수님께 다가갔습니다. 가까이 다가온 그에게 무엇을 바라느냐고 예수님께서 물으시자 “스승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마르 10,51)라고 자신의 소원을 말했습니다. 그의 열망을 듣고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마르 10,52) 그러자 소경이었던 그가 곧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그의 이름 바르티매오는 ‘티매오의 아들’이라는 뜻으로 티매오는 존경이란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합니다. 예수님을 믿고 그분을 직접 보고자 눈뜨기를 간절히 원했던 열망과 예수님께 대한 존경과 사랑이 그의 이름에 담겨 있는 것입니다. 치유받은 그가 예수님을 따라 길을 나섰다는 것으로 오늘의 이야기는 끝납니다. 예수님을 따라나선다는 것은 특별히 마르코 복음에서 그분의 제자가 된다는 것을 뜻합니다. 길가에 앉아 불쌍하게 구걸하던 눈먼 거지가 예수님을 만나 그분의 자비로 치유를 받았고 그분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더구나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수난과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 예루살렘을 향해 가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그러니 십자가를 지러 가시는 예수님을 따라나선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직전 내용에서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부활에 관한 세 번째이자 마지막 예고를 그분의 제자들이 전혀 알아듣지 못하고 있었다는 점이 강조되어 있습니다. 그런 내용을 바르티매오의 이야기와 연결해보면 예수님의 뜻을 알아보는 데 있어 제자들은 멀쩡한 눈을 갖고 있었지만 소경이나 다름없었던 반면 그 걸인은 육체적으로는 앞을 볼 수 없는 상태였지만 오히려 밝은 눈을 지니고 있었던 것입니다.
볼 수 있는 눈은 있지만 참된 것을 보지 못한다면 어찌 바로 본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점에서 우리 자신에 대해 성찰하게 됩니다. 만일 우리가 창조주께서 지으신 세상 만물의 아름다움을 전혀 볼 줄도 모르고 살아간다면, 또 가족 간의 친밀한 사랑과 이웃 사람들의 선한 의지와 행동 안에 담긴 하느님의 일하심을 볼 줄 모르고 살아간다면 우리도 마음의 눈이 먼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사실 우리는 저마다 크고 작은 내면의 문제들로 인해 온전하지 못한 상태로 살아갑니다. 그런 점들을 바로 알고 직면해 극복하기 위해서는 바르티매오처럼 예수님의 사랑과 자비에 호소하는 끈질긴 믿음이 필요합니다. 더욱이 좌절과 시련에서도 벌떡 일어나 예수님께 망설임 없이 나아가는 믿음의 실천이 필요합니다.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마르 10,52)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믿음의 위력을 강조하신 것이고 동시에 당신의 일을 이루는 과정에서 믿음이라는 우리의 응답을 요구하신다는 것을 분명하게 합니다. 예수님의 자비와 사랑에 대한 믿음이 하느님 뜻을 올바로 보게 하는 우리 내면의 눈을 밝게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