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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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묵상] 연중 제30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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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30주일입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바르티매오의 치유를 들려줍니다. 이는 마르코복음에 나타나는 마지막 치유 기적이자 치유된 사람의 이름을 유일하게 밝히는 기적입니다. 마르코복음에서는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응답한 모든 제자들의 이름이 소개됩니다. 다른 두 공관복음서와 다르게 치유된 사람의 이름을 알려준다는 건 바르티매오의 이야기가 단순한 치유 기적이라기보다는 제자로의 부르심에 더 큰 비중을 둔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게 합니다.


예수님께서 누군가를 당신 제자로 부르실 때 사용하셨던 ‘부르다’(φων?ω·포네오)라는 동사가 이 이야기 속에 세 번 반복하여 등장합니다. 당신을 따르라고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자신이 가졌던 모든 것, 배와 아버지, 그물을 버렸습니다. 바르티매오 또한 부르심을 듣자마자 자신의 겉옷을 버립니다. 당대의 겉옷은 단지 외투만을 의미하지 않았습니다. ‘이불’을 지칭할 때도 있었고, 입는 옷이라기보다 덮는 옷에 가까웠습니다. 때로는 신분을 드러내는 도구가, 때로는 담보 잡힐 수 있는 재산이, 또 때로는 보호의 상징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런 ‘겉옷’을 던져 버리는 행위에서 예수님의 부르심에 대한 바르티매오의 응답과 결단을 엿볼 수 있습니다.


인물이 처한 상황과 진행 과정의 상세한 서술에서 저자가 이야기에 공들인 흔적들이 여실히 드러납니다. 티매오의 아들이라는 뜻의 바르티매오는 선천적인지 후천적인지 알 수는 없지만 시력을 상실한 사람입니다. 그는 길가에 앉아 구걸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그저 ‘나자렛 사람 예수’라고 불렀으나 바르티매오만은 그분을 ‘다윗의 자손 예수’라고 일컬었습니다. ‘다윗의 자손’은 하느님 약속의 메시아, 구원자라는 의미로 일종의 신앙고백이 담겨 있는 호칭입니다. 마르코복음에서 그 어떤 인물도 예수님을 향해 다윗의 자손이라 부른 적이 없다는 것을 고려하면 그의 고백이 예사롭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바르티매오는 사람들이 조용히 하라며 핀잔을 주어도 아랑곳하지 않고 오히려 더 큰소리로 외칩니다.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우리는 이야기가 이루어지고 있는 ‘길’이라는 공간 역시 주목해야 합니다. 주님은 지금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고 계십니다. 예루살렘은 당신이 수난을 당하시고, 죽으시며 묻히시는 장소로 여행의 종착지임과 동시에 생의 마침표입니다. 바르티매오는 그런 예수님의 길을 따라나섰습니다. 그분을 따라나섰다는 것은 바르티매오가 예수님의 정체성을 제대로 인식하고 있으며 그분의 사명을 수용한 사람, 곧 제자가 되었음을 암시합니다. 길가에 ‘주저앉아’ 있던 사람이 ‘벌떡 일어나’ 따라나섰다는 것은 사실적 묘사이기도 하겠으나 그보다는 바르티매오의 삶이 변화하였음을 의미하는 표현에 가깝습니다. 이야기의 핵심이 치유 기적보다는 제자 됨이라는 것이 다시 한번 드러납니다. ‘따르다’와 ‘길’은 제자의 삶에 있어 매우 중요한 단어입니다.


바르티매오의 이야기는 바로 앞서 부르심을 받았던 부자 청년(마르 10,17-22)을 소환시킵니다. 사회적으로 부유한 사람인 청년과 사회적으로 가장 가난한 사람인 바르티매오는 길에서 예수님을 만납니다. 부자 청년은 예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았지만 재산을 포기하지 못해 떠나갑니다. 그러나 바르티매오는 자신이 소유한 모든 것을 포기하였습니다. 마르코는 부르심에 응답하지 않은 부자 청년의 이름은 알려주지 않습니다.


이뿐만 아니라 바르티매오는 제베대오의 두 아들인 야고보와 요한과도 대조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마르 10,35-40) 둘은 직책을 요구하였던 반면 그는 오직 자비만을 청하였습니다. 예수님이 동일하게 던지시는 “내가 무엇을 해주기를 바라느냐?”라는 질문이 야고보와 요한, 바르티매오의 대비를 더욱 선명하게 합니다.


이야기의 바로 앞 단락에는 열두 제자들 간의 자리다툼과 서열 싸움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세 번째 수난 예고가 있자마자 제자들 사이에는 서열 다툼이 발생하였습니다. 주님께서 세 번이나 당신 수난에 대해 말씀하셨지만, 전혀 알아듣지 못하고 있는 제자들의 모습은 바르티매오의 행동과 완전히 대조됩니다. 마르코복음의 저자는 열두 제자가 아닌 바르티매오를 통해 삶의 본보기를 제시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진정한 제자란 어떤 사람인지, 그리고 어떠한 자세를 지녀야 하는지 천명합니다.


바르티매오의 행동과 외침이 오래도록 잔상과 이명을 남깁니다. 눈먼 이가 오히려 제대로 보는 사람이고, 멀쩡히 볼 수 있는 사람이 오히려 눈먼 이와 같은 묘한 역설이 만들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르코에게 있어 제자란 예수님의 정체성을 올바로 인식하고 그분의 소명을 수용한 사람이자 수난의 길을 따르는 사람입니다. 오늘, 새로운 눈 뜨임을 청해야겠습니다. 움켜쥔 채 놓지 못하고 있는 겉옷도 이제는 내려놓아야겠습니다.



글 _ 임미숙 엘렉타 수녀(툿찡 포교 베네딕도수녀회 대구수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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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24-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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