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꼭 하나를 선택해야 하고, 꼭 1등이 누구인지 정해야만 하는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엄마와 아빠 중에서도 누가 더 좋은지 선택을 강요받으며 커온 우리이기도 합니다. 아마도 이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공통된 일인가 봅니다.
예수님 시대의 한 율법 학자도 예수님께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마르 12,28)라고 묻습니다. 어찌 보면, 우리도 하고 싶었던 질문을, 고맙게도, 이 율법 학자가 대신해 준 것이기도 합니다. 이 율법 학자는 분명히 한 개의 정답을 바라고 질문했을 것입니다. 정말 첫째 가는 1등 계명이 무엇인지 깔끔한 한 개의 정답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두 개의 답을 주십니다.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마르 12,30)와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마르 12,31)라는 두 개의 계명을 답으로 주신 것입니다.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데 두 날개가 되어주는 가르침이 있다면, 하나는 바로 ‘하느님을 사랑하라’는 계명이요, 다른 하나는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이라 하겠습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두 날개가 있어야만 하느님께 힘차게 날아갈 수 있는 것이지요. 어느 하나만 고집하고 어느 하나에만 치우쳐서는 결코 날아오를 수 없습니다.
전설의 새 비익조는 암수 각각 눈과 날개가 하나밖에 없는 새입니다. 그래서 둘이 몸을 꼭 붙여 껴안고, 하나 된 날갯짓을 힘차게 할 때만이 비로소 하늘을 향해 비상할 수가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도 어느 한쪽의 날개가 아니라 하느님 사랑이라는 날개와 이웃 사랑이라는 두 날개가 비익조처럼 하나의 날갯짓을 할 때, 하느님을 향한 힘찬 비상을 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둘이 아니라 하나입니다. 이웃 사랑이 없는 하느님 사랑은 공허할 뿐이고, 하느님 사랑이 없는 이웃 사랑은 요란할 뿐입니다. 사족을 덧붙이자면, “하느님을 사랑하느냐?”라는 질문에는 쉽게 혹은 어느 정도 무책임하게 “네”라는 대답을 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느냐?”라는 질문에는 대답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고민과 망설임을 동반한 깊은 반성과 사색이 요구될 것입니다. 아마도 “아니오”라는 대답이 양심적이고 솔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 이 두 날개가 어느 한쪽으로 치우침 없이 조화를 이룰 때만이 하느님을 향한 힘찬 날갯짓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박규흠 베네딕토 신부 | 제14 동작지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