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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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전화 지킴이 노릇

[월간 꿈 CUM] 꿈CUM 수필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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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8월 초, 열흘이 넘도록 34도를 웃도는 폭염이 계속되던 때의 일이다.

가끔 만나 점심을 먹는 문우들에게서 연락이 왔다. 집에 있는 것도 힘드니, 오늘 하루 밖에서 만나 놀잔다. 찜통더위 속에 외출을 자제하라지만, 너무 더워 나가는 게 더 나을 수도 있다고. 옳은 말이다. 마침 강남역 부근에 사는 친구가 의견을 냈다. 대낮에 밖으로 나와 도로를 걷는 것도 무리가 될 테니, 지하철 강남역 8번 출구에서 만나 지하에서 다 해결하잔다. 오, 굿 아이디어! 

집이 더워 좀 일찍 나갔더니 11시 조금 넘어 목적지에 도착했다. 약속시간보다 40분이나 이른 시간이다. 의자가 있는지 두리번거렸지만 없다. 장소를 정한 문우에게 전화를 걸어, 음식점 이름을 알려주면 그리 가서 기다리마고 했다. 친구는 거기 ‘삼성전자’라고 쓰인 화살표를 보고 내려가서 문 건너편에 있는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다시 올라가란다. 그럼 긴 통로에 벤치가 있으니 거기 앉아 기다리면 된다고.

나는 그의 말대로 내려가고 올라가, 반가운 의자를 찾았다. 많은 사람이 오고 가고, 또 여기저기 긴 의자가 있어 사람들이 누군가를 기다리며 앉아 있다. 맨 처음 보이는 벤치로 다가가 앉았다. 그런데 바로 옆에 손전화가 하나 놓여 있다. 최신 기기 같고, 고급스러워 보인다. 주인이 잠시 두고 자리를 비웠나? 두리번거렸지만 아무도 오지 않는다. 이를 어쩌지? 사람들이 계속 오고 가는데, 이 전화기를 그냥 두고 일어설 수는 없는 일. 화장실도 좀 가고 싶었지만 참았다. 누군가가 오겠지. 오겠지. 그러나 오지 않았다. 이 주인은 아직 전화기 놓고 온 것을 모르나? 어쩌지? 이 손전화 지키려고 내가 이렇게 빨리 왔던 것인가?

문득 무언가 잃어버리면 안토니오 성인에게 기도하라던 얘기가 떠오른다. 기도하면서 찬찬히 생각하면 대개 어디서 잃어버렸는가가 생각난다는 것이다. 나는 간절한 마음으로 안토니오 성인을 불렀다. “안토니오 성인이시여, 이 손전화 주인이 어서 분실한 사실을 깨닫고 이리로 찾아오게 도와주십시오.”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_굿뉴스

 


시간이 자꾸 흘렀다. 10분, 20분, 30분, 점심시간이 가까워지면서 더 많은 사람이 오고 가고, 나처럼 약속한 사람을 기다리느라 의자에 앉았다가 서로 반기며 떠나곤 한다. 어쩌지? 이 주인이 찾아오기 전에 친구들이 먼저 오면 안 되는데….

그때다. 전화기에서 벨이 울린다. 아이고, 반가워라. 얼른 받았다. 나는 하도 기뻐서 대뜸 “전화 주인이 없어서 제가 받았어요. 이 전화 주인 아시나요? 제가 지키고 있는데.” 그러자 젊은 여성의 목소리가 나온다. “아, 감사합니다. 친구가 의자에 두고 왔대요. 지금 찾으러 갔어요. 곧 갈 거예요. 조금만 더 기다려 주세요 .”

아아, 안토니오 성인님, 감사합니다. 안도의 숨을 쉬고 있는데, 곧 저쪽에서 한 젊은 여성이 근심 가득 띈 얼굴을 하고 나 있는 쪽으로 허둥지둥 걸어온다. 틀림없이 주인이다. 나는 들고 있던 전화기를 높이 들어 보여 준다. 여성이 활짝 얼굴을 펴며 달려온다.
 

 


나는 전화기를 건네며 말한다. “30분을 기다렸어요. 제대로 찾아와 주어서 정말 기뻐요.” 그리고는 나도 모르게 성호를 그으며 “하느님, 감사합니다.” 했다. 그 여자도 덩달아 성호를 그으며 “감사합니다.” 하고는 몇 번이나 고개 숙여 인사한다. 내가 웃으며 “행복하세요!” 했더니, 여성도 수줍게 웃으며 오가는 사람들 사이로 총총히 떠난다.

나도 곧 친구들이 나타나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근처의 음식점으로 갔다. 주문한 음식이 나올 동안 나는 좀 전의 일을 들려준다. 친구들도 함께 기뻐한다. 요즘은 스마트폰 없어지면 아무것도 못 하는 세상이 되어 버렸다면서.

그리고 식사 후의 일이다. 그 지하 통로에 있는 갤러리로 들어갔다. 그림들을 감상하며 다니는데, 젊은 여성 여럿이서 그림을 보고 있다. 근데 그중 하나가 내게 인사를 한다. 어머나, 세상에! 바로 손전화 주인이다. 이럴 수가! 나는 깜짝 반기며 내 친구들을 불러 말한다. “아까 말한 그 전화기 주인이야.”

그러자 또 그 여성은 자기 친구들을 불러 말한다. “아까 말한 그분, 내 전화기 지켜 주신 분이야.” 그 친구들이 내게로 몰려온다. 그중 한 사람이 말한다. “이 친구가 너무 감동했대요. 마지막에 성호까지 그으며 좋아하셨다고요. 우리 다 교우예요.” “네? 우리도 다 교우예요. 여긴 알비나, 여긴 아가다. 나는 실비아.” 그러자 그쪽도 세례명을 하나하나 댄다. 여고 동창인데 하도 더워서 이곳 지하에서 만나 놀기로 한 거란다. 근데 친구가 일찍 나와 의자에서 기다리다가 그만 전화기를 놓고 오는 바람에 애를 태웠다고. 정말 감사하다고. 자기네도 점심 먹고 그림 보러 들어왔다고.

하하. 우리 하느님, 참으로 재미있으신 분. 이렇게 다시 만나게 해 즐거움을 선사해 주시다니!

몇 날 며칠 계속되던 찜통더위를 싹 물리친 유쾌한 하루였다.


글 _ 안 영 (실비아, 소설가)
1940년 전남 광양시 진월면에서 출생했다. 1965년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했으며, 장편소설 「만남, 그 신비」, 「영원한 달빛, 신사임당」, 소설집 「둘만의 이야기」 「치마폭에 꿈을」 수필집 「나의 기쁨, 나의 희망」 동화 「배꽃마을에서 온 송이」 등을 펴냈다. 현재 한국문인협회, 국제펜 한국본부, 한국소설가협회, 한국여성문학인회, 가톨릭문인회 회원이다. 한국문학상, 펜문학상, 월간문학상, 한국소설문학상, 중앙대문학상, 제1회 자랑스러운 광양인상을 수상했다.
 



[기사원문보기]
가톨릭평화신문 2024-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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