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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 인물] 아버지 다윗에게 반기를 들었다가 죽은 압살롬 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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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일천하’로 불리는 갑신정변(甲申政變)은 1884년 12월 4일 김옥균과 박영효, 서재필, 서광범, 홍영식 등 젊은 개화당(開化黨)이 청나라에 의존하는 수구당(守舊黨)을 몰아내고 개화정권을 수립하려 시도한 일종의 쿠데타이다. 우정국(郵政局) 낙성식을 계기로 정변을 일으켜 당시 문제를 일으키던 민 씨 친인척들과 부패 관리들을 처형하고 축출하였다. 12월 6일에 개화당은 중국 내정간섭 배제, 문벌과 신분제 타파, 능력에 따른 인재 등용, 국민들의 평등권 확립, 조세 제도변화 등의 혁신적인 정책을 내놓았다.


당시 갑신정변이 실패한 근본적인 이유는 혁명에 대한 민중들의 이해가 적었고 일본을 너무 쉽게 믿고 많이 의존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민족의 중흥을 위해 구습의 봉건체제를 변화를 시도했던 혁명이라는 점에서 실패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들은 긍정적 가치를 두고 있다. 주동자 김옥균은 외국에서 살해당했고 그의 머리는 종로거리에 걸렸다. 한 영화의 대사 생각난다. “성공하면 혁명, 실패하면 쿠데타 아닙니까!”


다윗의 아들인 압살롬은 위로 두 명의 형제가 있었는데 한 명은 장남 암논이었고, 둘째는 어릴 적에 죽었다. 압살롬의 왕위 계승 서열은 암논 다음이었다. 그런 둘 사이에 돌이킬 수 없는 사건이 발생했다. 암논은 압살롬의 친동생이자 자신의 이복동생인 타마르에게 흑심을 품고 있었다. 하루는 꾀병을 부려서 병간호를 위해 찾은 타마르를 자기 침실에 끌어들여 몹쓸 짓을 했다. 한참 후 사랑이 식은 암논은 타마르를 쫒아냈다. 


전후 사정을 알게 된 압살롬은 암논을 처치할 복수를 계획했다. 다윗 왕도 암논이 타마르에게 한 사건의 전모를 듣고 노발대발했으나 정작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는 않았다. 다윗 자신도 부하의 처인 밧 세바를 빼앗아 아들을 징계할 도덕적인 명분이 없었다고 생각했을까? 시간이 지나도 암논에 대한 징계는커녕 오히려 다윗의 마음이 암논에게 기우는 것을 눈치챈 압살롬은 자신의 부하들을 시켜 암논을 살해했다.


그 사건으로 압살롬은 국외로 나가 3년간 타향 생활을 했다. 우여곡절 끝에 다시 이스라엘로 압살롬이 돌아왔지만 다윗은 문전박대했다. 시간이 자꾸 흐르자 초조해진 압살롬은 자기의 세력을 늘리기 시작했다. 다윗에게 불만을 품던 상황에서 압살롬이 반란을 드디어 일으켰다, 압살롬은 큰 피해 없이 예루살렘을 점령한다. 압살롬의 책사였던 후사이라는 인물은 사실 다윗의 첩자였는데 그의 말을 듣고 추격을 멈추는 오판을 저지르고 말았다. 결국 전투 경험이 많은 다윗의 정예병들은 압살롬의 군대를 완패시켰다.


출정하는 부하 요압에게 다윗은 압살롬이 반란자지만 죽이지는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하지만 후환이 있을 거라 판단한 요압은 부하 열 명과 함께 압살롬을 죽였다. 압살롬이 죽었다는 소식을 접한 다윗은 그의 이름을 부르며 크게 통곡했다. 압살롬의 다윗에 대한 반란은 진압되었지만, 다른 이스라엘 지파들의 불만 세력들이 서서히 고개를 들기 시작하는 계기가 되었다.



글 _ 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영성심리상담교육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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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24-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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