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림 제1주일입니다. 교회의 전례력으로는 한 해를 마무리하고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하는 날입니다. 유다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신 예수님(마태 2,1 참조), 그리고 그분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우리의 마음은 이미 베들레헴의 어느 한 작은 마구간 문 앞에 가있습니다. 대림초에 밝혀진 불빛을 보면서, 설레는 기다림 속에 “아기 예수님, 어서 오세요”하고 기도하게 됩니다.
오늘 주일에 선포되는 복음 말씀에서는 우리가 기대하는 분위기와는 다른, 곧 기쁨과 설렘보다는 공포와 두려움이 느껴집니다. 그 내용이 예수님의 종말론적 담화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잡히시기 전에(루카 22,47-53 참조) 성전에서 백성들을 가르치시며(루카 20장 이후 참조) 예루살렘과 성전의 운명, 이 세대가 처한 위기에 대한 말씀을 전하며 세상에 닥칠 일에 대해 알려주셨습니다(루카 21,5-36 참조).
오늘 복음 말씀의 초반부는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오실 것이라는 예고가 중심을 이룹니다(루카 21,25-28 참조).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닥쳐오는 것들”(루카 21,25), 곧 하늘에서는 해와 달과 별의 표징들이, 그리고 바다에는 거센 파도를 일으키는 표징들이 나타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은 공포에 휩싸일 것인데, 하늘의 세력들이 흔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표징이 세상에 나타날 때, ‘그때에’ 사람의 아들이 권능과 큰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실 것입니다. 루카 복음 21장 27절은 다니엘서 7장 13절의 언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아들 같은 이가 하늘의 구름을 타고 나타나 연로하신 분께 가자 그분 앞으로 인도되었다.” 하늘의 구름을 타고 오실 ‘사람의 아들’의 등장에 대한 예고는 제자들(그리스도인들)의 구원을 시간이 임박했음을 알려줍니다.
후반부의 주제는 주님의 오심을 준비하기 위해 깨어 기도하라는 권고입니다(루카 21,34-36 참조). 이 권고로 (루카 21,5에서 시작한) 예수님의 종말론적 가르침은 마무리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제자들에게 언제, 어떻게 도래할지 모르는 ‘마지막 날’을 준비하라고 촉구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제자들은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과 걱정으로 짓눌려 마음이 둔해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이러한 삶은 ‘마지막 날’을 기다리며 준비하는 자의 모습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다시 오실 주님을 맞이하기 위해 늘 깨어 기도해야 합니다.
여기에서 루카복음의 중요한 신학적 주제 중 하나인 ‘기도’가 다시 한 번 강조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종말론적 상황에서 처할 수 있는 긴장을 완화시켜 일상적 삶에서 마지막 날을 준비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려고 합니다. “너희는 앞으로 일어날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나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루카 21,36)
주님의 오심은 이미 구약성경, 특별히 예언자들을 통해 전달되는 하느님의 약속에서 예고되었습니다(「강론지침」 81항 참조). 오늘 제1독서는 예레미야 예언자가 전하는 구원 신탁 중 일부분인데, 여기에서 이스라엘 집안과 유다 집안에게 주신 하느님의 약속을 듣게 됩니다. 이 약속은 하느님께서 다윗과 맺으신 계약(2사무 7,11-16; 23,5; 시편 89,4-5 참조)에 기초하며, 바빌론 유배에서 돌아온 이스라엘을 회복시켜 주실 것이라는 예고를 의미합니다. 예레미야의 예언에 따르면, 다윗 왕조의 재건은 “정의의 싹”(예레 33,15)을 통하여 이루어질 것입니다.
여기서 “정의의 싹”은 다윗 가문에서 태어날 임금을 상징합니다. 죽은 줄만 알았던 나무에서 새순이 올라 자라날 것입니다. 다윗 가문에서 후손이 나와 그가 세상에 정의와 공정을 세울 것이라는 예고는 세상에 울려 퍼지는 위로와 희망의 메시지입니다. 이 예고는 남유다의 마지막 임금이었던 치드키야에 대한 경고의 메시지이기도 합니다. 치드키야는 “주님은 나의 정의”라는 의미를 가진 이름을 받았지만, 자신의 이름에 맞게 세상에서 공정과 정의를 세우지 못했고 유다의 패망을 고통스러운 방식으로 경험했습니다. 그는 기원전 587년 예루살렘이 바빌론에 의해 함락되자 예루살렘을 버리고 도망갔는데(2열왕 25,1-7 참조), 이후 예리코 벌판에서 붙잡히고 맙니다(예레 39,5 참조).
오늘 독서와 복음은 대림시기를 시작하는 우리 각자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신 주님의 오심과 심판을 깨어 준비해야 한다는 사실을 상기시켜주고 있습니다(「강론지침」 80항 참조). 이는 우리가 고백하는 신앙 내용이기도 합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분께서는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러 영광 속에 다시 오시리니 그분의 나라는 끝이 없으리라.”(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경 중)
이 신앙 고백의 내용을 어떻게 구체적으로 살아야 할까요?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을 제2독서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모든 사람을 향한 사랑이 더욱 자라고 충만하게 되길 바라며 기도했습니다. 그 사랑은 각자 사랑을 지니고 있을 때 가능하고, 하느님께서는 각자 지니고 있는 사랑을 풍요롭게 해 주실 것입니다. 모든 사람을 향한 사랑이 성숙되고 풍요로워져야 하는 이유는 흠 없이 거룩하고 온전한 사람이 되기 위함입니다.
우리 안에 머물러 있는 사랑이 모든 사람을 위한 사랑으로 자라나고 충만하게 될 수 있도록 대림시기를 시작하는 이때에 구체적 결심을 세워봅시다. 바오로 사도는 테살로니카 신자들을 격려하였듯이 오늘 우리를 격려해 주고 계십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어떻게 해야 하느님 마음에 들 수 있는지 우리에게 배웠고, 또 그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더욱더 그렇게 살아가십시오.”(1테살 4,1)
글_정진만 안젤로 신부(수원가톨릭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