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2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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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리’에 흔들리지 않으려면 나만의 의미 해석 단계 거쳐야

[김용은 수녀의 오늘도, 안녕하세요?] 96. ‘왝더독(wag the dog)’ 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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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보도의 덫에 걸린 언론사들의 치열한 특종 경쟁이 이어지고 검증되지 않은 대량의 정보가 우리 지각을 무뎌지게 하면서 편견과 오류를 낳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출처=Wikimedia Commons

“개가 꼬리를 흔드는 이유를 알아? 개가 꼬리보다 똑똑하기 때문이지. 만일 꼬리가 더 똑똑하다면 꼬리가 머리를 흔들겠지.” 미국 대통령의 스캔들을 덮기 위해 참모들이 공작정치를 벌이는 영화 ‘꼬리가 머리를 흔든다(wag the dog)’의 명대사다. 중요한 사건의 핵심을 덮기 위해 주의를 딴데로 돌리려는 정치적 책략을 비유할 때 종종 소환되는 말이다. 작은 이슈가 커다란 흐름을 바꾼다. 특정인의 댓글이 주요 내용을 흔들고 헤드라인으로 등장한다. 악플이 한 인간의 인격을 여지없이 무너트리고 생명줄까지 끊는다. 꼬리인 듯 꼬리 아닌 것 같은 꼬리가 몸통을 마구 흔들어댄다.

매일 쏟아지는 정보의 범람에 익사할 지경이다. 너무 빠르고 자극적인 이슈는 반복적으로 노출되고 미처 판단하고 식별하고 비판하기도 전에 우리의 정서에 흡수된다. 특정 이슈를 과도하게 강조하고 포장하여 여론의 중심에 서게 하고 자연스럽게 핵심적인 사건으로 떠오른다.

‘단독보도’의 덫에 걸린 언론사들의 치열한 특종 경쟁이 이어지고 개인적으로 주고받았던 전화 녹취와 문자메시지들이 미친 듯이 쏟아져 나온다. 걸러지지 않고 검증되지 않은 대량의 정보는 우리 지각을 무뎌지게 하면서 편견과 오류를 낳는다. 감정적 갈등은 정치적 양극화로 이어지고 진짜 본질은 사라진다. 비판하고 분석하면서 왜곡을 경계하지 않는 사이 우리는 꼬리에 의해 흔들리는 대중이 된다.

디지털 시대의 ‘왝더독’ 현상은 더욱 강하게 증폭된다. 보고 싶고 알고 싶은 정보들로만 가득 찬 거품 안에 갇히는 ‘필터버블(Filter Bubble)’은 대중의 사고와 행동을 조종하는 디지털의 ‘왝 더 독’이다. 나의 클릭패턴을 학습한 알고리즘이 나의 관심사를 기반으로 맞춤형 정보를 제공하고 ‘디지털 독방’에서 정보의 ‘거품’ 안에 갇히게 한다. 다른 관점의 정보를 제한하고 다양성이 상실되면서 ‘다름’에 분노하고 저항한다. 신념이 고집이 되어 흥분하는 대중은 꼬리에 의해 마구 흔들린다.

플라톤의 ‘동굴의 우화’처럼 동굴 안에서 그림자만 본 사람은 그것이 진짜라고 믿는다. 동굴 밖에 나가 진짜 사물을 본 사람이 “이것은 그림자야! 진짜는 따로 있어!”라고 소리친다 하더라도 동굴 안 사람들은 믿지 않을 것이다. “못 믿겠다면 동굴 밖으로 나가서 확인해봐!”라고 한다고 해서 동굴 안에서만 살아온 사람들이 “그래, 나가보자” 할 리 없다. 밝은 동굴 밖은 위험한 세상이고 어두운 동굴 안은 안전하다. 그리고 생생하게 보이는 ‘그림자’가 실재라며 더 큰 소리로 우겨댈 것이다. 그림자의 실체를 보려면 밖으로 나가야 한다. 익숙한 동굴을 떠나 낯선 세상으로 나가봐야 알 수 있다는 것조차 부인할 것이다.

디지털 정보에 묻혀 사는 우리는 동굴의 죄수처럼 그림자를 실재보다 더 실재처럼 오인하고 사는 것은 아닐까? 알고리즘에 의해 제공된 정보에만 의존하면서 결국 다른 세상을 경험한 사람의 정보를 ‘가짜’라고 일축한다. 다른 세상을 볼 수 없고 믿지 않으니 다양성은 위축되고 확증편향은 강화된다. 게다가 나와 다른 신념과 의견을 가진 사람을 적대시하면서 강화된 정치적 양극화는 혐오를 불러내고 점점 더 편 가르기 양상으로 드러난다.

사유하는 분석적 노력이 있어야 더 넓은 시야를 확보할 수 있다. ‘그림자’만을 근거로 얻어진 지식과 논리는 몸통을 흔들어대는 ‘꼬리’만 똑똑하게 할 뿐이다. 꼬리에 의해 흔들리지 않으려면? 내가 알고 있는 정보는 알고리즘에 의해 제한된 편향적 정보라는 사실을 자각하고 인정하는 데서 시작해야 할 것 같다.

그리고 무엇보다 정보량을 제한하는 노력이다. 정보 과잉은 주의력을 분산시키면서 분석적 능력을 저하시킨다. 정보는 읽으면서 동시에 해석하고 분석해야 한다. 무언가를 읽어낸다는 것은 지각을 통해 인지하는 의미 해석의 단계를 거친다. 해석하도록 자극을 받으면 정신적이고 영적인 차원으로 가는 길이 열린다. 정보에 의해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은 나의 인격이기도 하다. 니체는 ‘사실은 없고 오직 해석만 있다’고 했다. 그렇다. 우리가 매일 보고 듣는 뉴스는 미디어를 통한 ‘재현’일 뿐이다. 결국 나만의 노력으로 멈춰 깊이 사유하면서 얻은 해석만이 사실과 진실에 조금 더 다가가게 해줄 것이다.



<영성이 묻는 안부>

우리는 매일 수많은 정보에 파묻혀 살아가고 있습니다. 한시도 정보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게다가 요즘은 알아야 할 것들이 자꾸만 쌓여가는 느낌입니다. 알고 싶지 않아도 알아야 할 것 같은 조바심에 ‘검색’을 하게 되지요. 하지만 검색으로 알게 된 ‘정보’는 우리를 똑똑하게 해주지는 않습니다. ‘정보’는 그저 ‘무엇’을 말할 뿐이니까요. 그러니깐 그 무엇을 알고 있다는 잠깐의 포만감을 느끼게 해주지요.

하지만 사유와 사색에서 얻어낸 지식은 ‘어떻게’의 길을 열어줍니다. 나만의 해석으로 얻어낸 새로운 창조물인 거죠. 뉴스를 보고 들을 때, 인터넷 검색에서 쏟아진 이슈와 정보들을 접할 때,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해석하는 사색의 공간을 만들었으면 좋겠습니다. 나만의 의미 해석의 단계를 거칠 수 있다면 ‘꼬리’에 의해 흔들리는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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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4-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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