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꿈 CUM] 꿈CUM 신앙칼럼 (26)
구유는 지저분하고 더러웠다. 어린 시절 시골에서 구유에 소죽(짚, 콩, 풀 등을 섞어 끓인 죽)을 담으면, 소는 소눈 감추듯 순식간에 먹어치웠다. 나는 기억한다. 그 남은 잔해가 얼마나 처참했는지 말이다. 구유 안은 소가 흘린 침과 소죽이 뒤범벅되어 있었다. 그런데 신앙은 나더러 예수님을 닮으라 한다. 예수님처럼 한없이 겸손해야 한단다. 구유에 누워야 한단다. 자신 없다. 난 사양할 것이다. 소가 침 흘리며 밥 먹던 곳에 나보고 누우라고?
찬 돌덩이 같은 마음을 누그러뜨린 것은 최근 춘천교구 화천본당 주일 미사 강론에서였다. 주임 신부님은 구상 시인의 시를 인용해 나의 얼음장 같은 마음을 부숴나갔다. “너는 네가 만든 쇠사슬에 매여 있다 … 네가 시방 가시방석처럼 여기는, 너의 앉은 그 자리가 바로 꽃자리니라.”(구상 시인의 「꽃자리」에서)
이와 비슷한 말을 당나라 임제 선사의 글에서도 읽은 바 있다.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入處皆眞) 어디를 가든 자신이 머무는 곳에서 스스로 주인이 되면, 그곳이 바로 진리의 자리라는 뜻이다. 세상에 지저분한 자리는 없다. 고난 가시방석에 앉아있어도, 지저분한 구유 속에 있어도 그 자리가 꽃자리다.
미국 옐로스톤 국립공원에 살던 물소의 개체 수가 줄기 시작했다.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이에 국립공원 측은 늑대를 풀어놓기로 결정한다. 그러자 놀랍게도 물소 개체 수가 늘었다. 늑대를 피해 다니느라 운동을 하고, 경계심을 가지면서 물소의 면역력과 수명이 획기적으로 늘어난 것이다. 물소에게는 늑대에게 공격 당하는 그 자리가 바로 꽃자리다.
언젠가 우리가 무척 행복해진다면, 그것은 우리가 이전에 큰 고통을 겪었기 때문일 것이다. 묵주기도에서 영광의 신비는 고통의 신비 뒤에 놓여있다. 오귀스탱 길르랑(Augustin Guillerand)은 「그들은 침묵으로 말한다」(이상현 옮김, 생활성서, 2022)에서 이렇게 말했다. “믿어봅시다. 우리가 살아가야 하는 뒤죽박죽인 이 세상에, 평화가 사라지고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진 이 세상에, 짓밟힌 우리의 영혼 안에 하느님께서 현존하신다는 것을, 하느님께서 그곳에서 넘치는 애정으로 자신을 내어 주시며 선한 의향을 지닌 영혼에 평화를 부어 주신다는 것을.”
구유가 꽃자리다. 12월 25일, 소가 침 흘린 뒤죽박죽 구유(이 세상)에 하느님이 현존하신다. 짓밟힌 우리의 영혼 안에 하느님께서 현존하신다. 하느님께서는 구유 안에서 넘치는 애정으로 자신을 내어 주시며 우리 영혼에 평화를 부어 주신다. 그러고 보니 구유가 달리 보인다.
오는 주말에는 강원도 화천에 갔다 오려 한다. 북한강 겨울 경치가 아름다울 것이다.
글 _ 우광호 발행인
원주교구 출신. 대학에서 신학과 철학을 전공했다. 1994년부터 가톨릭 언론에 몸담아 가톨릭평화방송·가톨릭평화신문 기자와 가톨릭신문 취재부장, 월간 가톨릭 비타꼰 편집장 및 주간을 지냈다. 저서로 「유대인 이야기」 「당신을 만나기 전부터 사랑했습니다」 「성당평전」, 엮은 책으로 「경청」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