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7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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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혹한 정치는 호랑이보다 무섭다(苛政猛於虎)

[월간 꿈 CUM] 철학의 길 _ 동양 고전의 지혜와 성경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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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기」, 「단궁하(下)편」에 공자가 제자들과 함께 태산 기슭을 지나갈 때의 일이었습니다. 한 처자가 무덤에서 서글피 곡소리를 내고 있었습니다. 공자는 제자인 자로를 시켜 그 사연을 알아보라고 합니다. 그 처자가 자로에게 하는 말이 “옛적에 시아버지께서 호랑이에게 죽었고, 남편 역시 호랑이에게 죽었으며, 이제 아들 또한 호랑이에게 죽었습니다.”

그런 무서운 일이 반복해 일어났음에도 이 마을을 떠나지 않는 것이 의아해 물으니 여인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가혹한 정치가 없어서입니다.” 이 말을 듣고 공자가 제자들에게 말합니다.

“가혹한 정치는 호랑이보다 무섭다.” (가정맹어호, 苛政猛於虎)

공자가 살던 시대는 주나라의 사회질서가 붕괴되기 시작하는 춘추시대였습니다. 왕실은 점차 힘을 잃고 제후국들이 패권을 다투는 전쟁의 시대가 도래한 것입니다. 각 제후국들은 부국강병을 위해 더 많은 세금과 병력이 필요했습니다. 그런 가운데 피해 보는 것은 일반 민중들이었습니다. 그런 가혹함을 피해 사람들은 외진 곳으로 숨어들어 갔습니다. 세상을 피해 산속으로 들어가 사는 ‘나는 자연인이다’ 속 인물들이 비일비재했던 것입니다.

주나라는 대체로 읍제 국가였습니다. 그 읍은 다시 ‘국’(國), ‘도’(都), ‘비’(鄙)로 구분되었습니다. 국(國)은 제후가 다스리는 곳이며, 도(都)는 제후가 파견한 대부가 다스리는 곳이었고, 비(鄙)는 국이나 도로부터 직접 통치받는 곳이 아니었습니다. 그곳 사람들은 성곽 밖 가장 천한 사람들로 취급되어 ‘야인’(野人)이라 불렸습니다. 물론 이곳도 더 혼란한 전국시대로 들어서면서 징병을 목적으로 직접 통치하기 시작합니다. 공자는 정치를 피해, 들로 산으로 흩어져 숨어 살던 사람의 처지를 보았던 것입니다. 그 비참한 현실을 말한 것이 바로 ‘가정맹어호’(苛政猛於虎), 즉 ‘가혹한 정치는 호랑이보다 무섭다’였습니다.

공자는 정치에 대해 말하길 “정치는 바르게(正) 하는 것이다(政者正也)”(「논어」 안연)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바르게 하는 것(正)’이란 무엇일까요? 공자에게 바르게 하는 것이란 ‘정명’(正名), 즉 이름 혹은 명칭을 바르게 하는 것입니다. 함의는 이름(名)과 그 안에 담고 있는 실제 내용(實)을 일치시켜 자기 이름에 맞게 행실하라는 것입니다. ‘~답게 살라’는 것이죠. 소위 ‘이름값 하라’는 것입니다. 대통령은 대통령답게, 국회의원은 국회의원답게, 검찰은 검찰답게, 경찰은 경찰답게, 언론은 언론답게, 종교인은 종교인답게. 자기 본분에 맞게 행실하라는 사회고발입니다. 공자가 볼 때 정치가 무너진 것은 자신의 신분과 위치, 지위에 맞는 처신을 잃어버렸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런 ‘정명’ 사상을 바탕으로 공자는 제자 자공에게 정치에 관해 말합니다.

자공이 정치에 관하여 묻자 공자가 말하길 “먹는 것을 풍족하게 하고, 군사력을 풍족하게 하고 백성들이 믿게 하는 것이다.” (「논어」 안연)

공자가 말하고 있는 정치란 풍족한 식량, 풍족한 군대, 그리고 백성의 믿음을 얻는 것이라 합니다. 요즘 말로 하면 경제, 국방을 튼튼하게 하여 백성에게 믿음을 주는 것입니다. 그 토대가 바로 ‘정명’, 자기 본분에 맞게 ‘~답게’ 처신하는 것입니다. 백성들에게 믿음을 주지 못하면 백성이 서 있을 수 없다고 공자는 말합니다(民無信不立). 지도자가 가혹한 수탈로 굶어 죽게 하고, 명분 없는 전쟁으로 목숨을 잃게 하니 불안한 백성은 결국 흩어져 야인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무능한데 가혹하기까지 하면 호랑이보다 무섭습니다. 공자의 시대가 그랬습니다.

성경에서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안식을 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마태 11,28)

당시 지도자들의 위선적 태도가 백성들에게 믿음을 주지 못하고, 무거운 짐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지도자들에게 말합니다. “눈먼 인도자들아! 너희는 작은 벌레들은 걸러 내면서 낙타는 그냥 삼키는 자들이다.”(마태 23,24) 여기서 ‘작은 벌레’와 ‘낙타’는 부정한 동물을 말합니다. 유다인들은 포도주를 담글 때 부정한 초파리를 걸러 내는 과정을 가졌습니다. 그런 작은 부정을 막기 위해 열심이면서 ‘낙타’라는 큰 부정은 삼키고 있다는 사회비평의 말씀입니다. 겉(名)은 그럴듯하나 속(實)은 탐욕과 부정으로 가득한 위선적 태도의 지도자를 비판한 예수님의 사회고발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어떤가요? 백성이 믿음을 가지고 있나요? 백성이 이 땅에 제대로 설 수 있나요? ‘잔혹한 통치를 두느니 차라리 통치가 없는 편이 낫다’라는 서양의 말이 있습니다. 공자의 말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입니다. 백성이 야인이 되지 않도록 믿음을 주었으면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거꾸로 호랑이보다 무서운 백성을 볼 날이 올 것 같습니다.

‘正’은 글자의 뜻으로 보면 성(?)을 바로 잡기 위해 성을 향해 발(止)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政’(정치)은 ‘正’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호랑이보다 무서운 예루살렘 도성에 목숨 걸고 입성하셨습니다. 바로잡아 안식을 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분노한 백성이 정치를 바로잡기 위해 도성으로 향할 일이 생기지 않도록 믿음을 주십시오.
 

 


글 _ 손은석 신부 (마르코, 대전교구 산성동본당 주임)
2006년 사제수품. 대전교구 이주사목부 전담사제를 지냈으며 서강대학교 대학원 철학과(동양철학전공)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소소하게 살다 소리 없이 죽고 싶은 사람 중 하나. 그러나 소리 없는 성령은 꼭 알아주시길 바라는 욕심쟁이다.

 



[기사원문보기]
가톨릭평화신문 2024-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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