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2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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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저희에게 평화를 주소서”

[김용은 수녀의 오늘도, 안녕하세요?] 99. 구조적 폭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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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개인에게 거대한 전쟁을 당장 막을 힘은 없다. 보이지 않는 구조적 폭력을 해체할 권력도 없다. 하지만 서로가 연결되어 있다는 진실을 의식하며 깨어있어야 한다.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서 폭격 피해를 입은 가족이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피신하고 있다. OSV

최근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한강 작가는 “세계는 왜 이토록 폭력적이고 고통스러운가?”라고 묻는다. 그러면서 동시에 “세계는 어떻게 이렇게 아름다운가”라고 답한다. 폭력적이지만 아름다움에 대한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바람과 해류. 전 세계를 잇는 물과 바람의 순환. 우리는 연결되어 있다. 연결되어 있다, 부디.” 작가의 이 숨 차오르는 간절함에서 해답을 찾아본다.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기에 폭력적이지만 아름답다고. 프란치스코 교황은 “인간의 고통과 불의를 외면하는 무관심은 평화의 가장 큰 적”이라고 한다. 무관심은 단절이고 폭력이다. 우리는 관심으로 이어지고 연결되면서 아름다운 평화를 유지할 수 있다.

다시 묻는다. 정말 세계는 왜 이토록 폭력적이고 고통스러울까? 세계의 폭력을 현장에서 목격한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대부분 우리는 미디어라는 창을 통해 폭력 현장을 체험한다. 전쟁 저널리즘은 의도적으로 극단적인 폭력을 보여준다. 때로는 드라마나 게임처럼 ‘선’과 ‘악’ 혹은 ‘친구’와 ‘적’이라는 구도로 적대감을 불러일으킨다. 전투와 무기, 사상자 수나 전쟁의 전략적 승패를 집중적으로 다룬다.

중립성 속에 감춰진 편향은 국가 이익이나 권력자 혹은 특정 집단의 입장을 대변한다. 그렇기에 갈등의 근본 원인이나 약자들의 소리를 듣기란 쉽지 않다. 외부적이고 직접적 폭력에 의해 감춰진 구조적 폭력, 불평등과 불공정으로 인한 억압, 사람들의 고통과 트라우마가 잘 드러나지 않는다. 어쩌면 가장 무서운 폭력은 보이지 않고 감춰진 폭력일 것이다. 국익을 지키기 위한 나라 간 싸움, 권력을 차지하기 위한 정당 간 주도권 다툼, 인맥과 학연 지연 간 연대로 인한 불공정, 타인의 시선과 나의 양심과의 긴장 속 구조적이고 상징적인 폭력은 매 순간 일어나고 있다.

노르웨이 평화학자 요한 갈퉁(Johan Galtung)은 외부적으로 드러나는 직접적 폭력(direct violence)이 없는 상태를 소극적 평화(negative peace)라고 했다. 그는 단순히 전쟁이나 직접적 폭력이 없는 상태를 넘어 구조적 폭력(structural violence)을 해체하고 정의롭고 평등한 사회로 나아가는 적극적 평화(positive peace)를 이뤄야 한다고 강조한다. 진정한 평화는 가려진 폭력, 구조적이고 상징적 폭력 구조까지 투명하게 들여다보고 해체시킬 수 있어야 한다.

“현직에 있을 때 면접관을 많이 해봤는데 합격자를 내정해놓고 할 때가 많아요. 양심상 면접자를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지요. 이 면접을 위해 그들이 얼마나 많은 준비를 하고 노력했을까를 생각하면 비애감이 느껴졌지요.”

비전임 교수로 있는 A는 10여 년간 전임교수 임용에 수없이 도전했지만 이번에도 떨어졌다. 무척 낙심하던 차에 누군가 던진 말이다. ‘당신 탓이 아니오’라는 위로의 말일 게다. 그렇다면 ‘누구 탓’일까? 그는 ‘불합격’의 이유도 모르고 ‘낙오자’라는 선고를 받아 고통받으며 자책한다. “서류심사는 1위였는데 학연으로 밀린 거 같아요.” 사실이라면 그는 구조적 폭력의 피해자다.

현대사회의 폭력은 점점 더 교묘하고 은밀해 잘 드러나지 않는 구조적 폭력으로 존재한다. 경쟁과 성과사회에서, 끊임없이 자기 계발을 강요당하는 시스템에서 때론 경쟁상대가 ‘적’이 된다. 소수의 합격자 그리고 다수의 탈락자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쟁사회는 인간 존재를 도구화하고 끊임없는 비교와 불안 속에 살아가게 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대는 “지상 재화가 소수 특권층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모든 이를 위한 것”이라는 사실에 깨어 있어야겠다. 무엇보다 “우리가 서로를 필요로 하고 서로에게 빚지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면서 ‘회심’만이 ‘참된 평화’로 이끌어 준다는 확신이 필요하다.(2025년 ‘제58차 세계 평화의 날’ 프란치스코 교황 담화 참조)

우리 개인에게 거대한 전쟁을 당장 막을 힘은 없다. 보이지 않는 구조적이고 문화적 폭력을 깔끔하게 해체시킬 권력도 없다. 하지만 서로가 서로에게 빚지면서 연결되어 있다는 진실, 재화나 기회가 결코 소수 특권층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의식하고 깨어있는 자세가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세계 평화의 날 교황 담화의 주제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저희에게 평화를 주소서’란 기도가 어느 때보다 절실하게 요구되는 중요한 역사적인 순간, 2025년 새해다.



<영성이 묻는 안부>

외부에서 가해지는 물리적 폭력에는 가해자와 피해자가 분명 존재합니다. 우리의 과거 역사를 보면 전쟁이 그러했고 범죄와 독재정권 억압이 그러했습니다. 하지만 현대에는 물리적 강제보다는 구조적이고 상징적인, 평화를 위장한 은밀한 폭력이 존재합니다. 거대한 권력 집단만 그런 것은 아닐 겁니다.

우리 일상 주변은 어떠한가요? 앞에선 미소 지으며 친절하고 정중하게 사람을 대하면서 돌아서서는 ‘미움’과 ‘오해’로 그를 단죄하고 평가하고 있지는 않은지요? 상대방의 학벌이나 가정 배경을 무시하거나 혹은 지지하는 정당이나 출신 지역에 대한 편견으로 사람을 대하는 것은 아닌지요? 이는 무의식적으로 행동하는 우리의 상징 폭력입니다. 누군가는 이러한 폭력으로 절망하며 아파할 수 있음을 기억하며 회심하는 ‘화해’와 ‘평화’를 기도하는 새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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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4-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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