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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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만의 ‘진영’ 벗어나 연대·공감하는 새해 소망 일구길

[김용은 수녀의 오늘도, 안녕하세요?] 101. 새해 목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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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목표는 각자 쟁취해야 할 이익보다 서로 아픔에 공감하고 품어주는 사랑의 공동체를 지향해야 하지 않을까. 이스라엘의 공습으로 폐허가 된 건물 잔해 속에서 레바논 시민 두 명이 서로를 위로하고 있다. OSV

새해 목표, 무엇이 좋을까? 대부분 우리는 새해가 되면 꼭 이루고 싶은 그 무엇을 목표로 삼고 이런저런 결심을 세운다. ‘목표’는 어떤 과정을 통해 이루고 싶은 미래의 상태를 의미한다. 동시에 공격의 대상이 되는 표적 또한 ‘목표’다.

목표(object)라는 영어 단어 역시 다양한 의미를 지닌다. 반대(ob) 편에 서 있는 물체를 던져(ject) 맞히는 것에서 유래한 이 말은 대상이 적이 될 수도 있고, 반대인 경우에 사용하기도 한다. 또한 상품일 수도 있고 단순한 물체일 수도 있고, 고립된 하나의 ‘객체’일 수도 있다. 이러한 ‘목표’는 자칫 야망과 집착으로 인해 목표 지상주의에 빠지기도 한다. 그러면 목표는 그저 적을 공격하는 표적이 되면서 주도권을 쟁취하는 과정에서 수단이나 도구가 정당화되기도 한다.

만약 ‘외모’에 대한 집착으로 ‘체중 감량’을 목표로 한다면 ‘음식’은 그저 칼로리의 숫자로만 보는 ‘대상’일 것이다. ‘몸’이란 대상은 자본이고 상품으로서 ‘외관’일 뿐이다. ‘내 집 마련’을 위한 목표가 과시하려는 허영심과 돈에 대한 집착이라면 ‘집’은 가족이 머무는 안락한 장소가 아닌, 자본이고 건물이 된다. ‘신심생활’이 단순히 신비적 경험을 위한 목표로 이어진다면 당장 옆에서 쓰러져가는 이웃의 불행은 보지 못할 수도 있다. 목표가 하나의 결과물로서 성취해야 하는 고립된 대상이라면 단순한 사물이고 단절된 객체일 뿐이다.

물리학자이며 심층 생태학자인 프리초프 카프라(Fritjof Capra)는 현대인들에게 ‘대상’에서 ‘관계’로의 패러다임 전환을 제안한다. 우리의 목표는 독립되고 고정된 ‘결과물’이 아닌 ‘과정’과 ‘상호작용’에서 움직이는 유기체다. 고립되고 멈춰있는 ‘명사’가 아니라 흔들리고 일렁이면서 변화하는 ‘동사’다. 이 목표는 수많은 대상을 연결해주는 ‘전체’로 시야를 확장시킨다. ‘관계’ 속에 끊임없이 조정하고 상호작용하면서 공통의 목표와 비전을 공유하며 서로 공감하고 연대하는 공동체로 성장한다.

언제부턴가 우리 사회는 ‘진영 논리’의 틀에 갇혀 허우적대며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진영 논리는 ‘대상’이 어디에 속해 있는지가 매우 중요하다. 메시지와 상관없이 어떤 진영에 속한 메신저인지가 더 중요한 판단의 기준이 된다. ‘우리’와 ‘그들’은 철저히 단절된 상태다. 진영 논리에서 나온 목표는 철저히 ‘대상’을 반대(ob) 편에 세워놓고 끊임없이 창을 던진다(ject). ‘그들’은 제거해야 할 대상이며 ‘우리’는 어떻게 해서라도 지켜내야 할 집단이기 때문이다. 상황이나 환경·사람이 변해도 ‘대상’은 늘 고정되고 고립된 객체에 불과하다. 진영에 속한 이들의 생각과 이념과 행동이 절대로 변하지 않는 이유다. 그러면서 어느 순간 진영의 이익이 목표 그 자체가 되고 만다.

‘목표’ 자체가 목표가 되면 목표 지상주의에 빠진다. 그러면 목표를 수행하는 여정에서 주변 것들은 소유해야 할 ‘대상’이고 수단이고 도구다. 결국 ‘우리’와 ‘그들’이 ‘우리’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간과하게 되고, 연대하고 공감하는 ‘전체’를 성찰할 수 없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우리’와 ‘그들’의 공동체는 고장 난 기계부품처럼 흩어지고 버려지면서 끔찍한 결과를 맞이할지도 모른다.

새해다. 목표를 세워야 한다면 하나의 짧고 간단한 ‘명사’가 아니길 바란다. 어쩌면 서툴게 이어지는 긴 문장 속의 ‘동사’여야 할 것이다. 우리의 목표는 ‘관계’에 의해 유기적으로 구현하는 ‘과정’이었으면 한다. 생명 없는 사물로 버려진 ‘객체’가 아니라 서로 연결되어 살아 움직이는 주체이기를. 반대편에 세워놓은 고정된 ‘대상’이 아니라 마주 보고 걸어가는 ‘동반자’이기를. 서로의 상처와 아픔을 끌어안고 공감하는 ‘사랑’이기를. 무엇보다 쟁취해야 할 ‘우리의 이익’이 아니라 공감하며 품어주는 ‘공동체의 나눔’이길 소망한다.



<영성이 묻는 안부>

더욱 강화된 경쟁 사회를 살다 보니 ‘목표’가 반드시 쟁취해야 하는 대상이 되곤 합니다. 좋은 대학을 가기 위해, 원하는 직장에 취업하기 위해, 내가 좋아하는 배우자를 만나기 위해, 성공한 삶을 살기 위해 자신을 채찍질하면서 매 순간 목표를 세우고 살아갑니다. 그러다 보니 목표를 이뤄가는 과정에서 ‘존재적 경험’보다는 ‘대상적 경험’에 빠져 사는 것은 아닌지 묻게 됩니다. 무언가 손에 직접 움켜쥐어야 하는 ‘대상’이고, 가시적으로 보여줘야 하는 ‘사물’이며, 성공했다고 증명할 ‘객체’로서 대상적 경험을 하고 싶어집니다.

‘되찾은 아들(탕자)의 비유’에서 작은아들의 목표는 ‘대상적 경험’이었습니다.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선 자유로워져야 하고 돈이 있어야 했습니다. 결국 유산을 챙기고 아버지의 품을 떠납니다.(루카 15,11-32 참조) 쾌락과 자유를 추구하는 ‘대상적 경험’은 모든 재산을 탕진하게 하고 자신의 목표가 헛된 것임을 알게 되지요. 그리고 아버지에게로 돌아옵니다. 대상적 경험에서 벗어나 존재적 경험으로 돌아서는 순간입니다. 드디어 아버지와 이웃과 가족과의 ‘관계’를 회복한 아들은 자기만의 ‘진영’에서 해방됩니다. 새해에는 자기만의 ‘진영’에서 벗어나 서로 연결하고 이어주는 ‘목표’를 향해 걸어나가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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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5-0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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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 덕분에, 영양을 공급하는 각각의 관절로 온몸이 잘 결합되고 연결됩니다. 또한 각 기관이 알맞게 기능을 하여 온몸이 자라나게 됩니다. 그리하여 사랑으로 성장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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