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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의 보편성

[월간 꿈 CUM] 요나가 내게 말을 건네다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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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은 주님의 것입니다.”(요나 2,10)

“성 바오로 6세 교황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마치면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우리 공의회의 신앙은 무엇보다도 먼저 사랑이었음을 강조하고자 합니다. … 착한 사마리아인의 옛 이야기가 우리 공의회의 정신을 이끌어 준 모범이자 규범이었습니다. … 이 공의회의 풍요로운 가르침은 인간에게 봉사하려는 단 하나의 목적을 지니고 있습니다.’”(프란치스코 교황 칙서 「자비의 얼굴」, 제4항)

1965년 12월 8일 역사적인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마치면서 우리 가톨릭교회가 절실히 깨닫게 된 가장 중요한 문제는 ‘고통받는 세계’였습니다. 사실 세상은 제1차, 2차 세계대전의 참상을 겪고 피를 흘리며 신음하는 강도 만난 나그네인데(루카 10,29-37 참조), 교회는 끊임없이 전례와 율법과 구원을 가지고 논쟁만 벌이고 있었던 것입니다.

교회 밖에서는 하느님의 백성들이 울부짖고 탄식하며 절규하고 있는데, 또는 거대한 개혁의 바람이 불어오는데, 교회는 성당 안에 보호막을 치고 안주하며 근엄한 전례의 향을 피우며 자신들만의 구원에 만족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구원의 최종 결정권자는 오직 하느님이십니다.

“구원을 주지 못하는 인간을”(시편 146,3) 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직 하느님께만 구원이 있음에도 교회가 감히 인간 구원에 대하여 결정권을 가진 듯 오만하였던 것입니다. 이 같은 오류를 바로 잡고자 깊은 반성의 성찰을 한 것이 제2차 바티칸 공의회였습니다. 따라서 공의회의 교부들은 시작부터 이렇듯 분명히 밝힙니다.

“하늘 아래 있는 모든 나라에서 모인 우리는 우리에게 맡겨진 모든 사람의 시련, 영육의 곤경과 고통과 염원과 희망을 우리 마음속에 지니고 왔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겪고 있는 온갖 고뇌에 우리는 끊임없이 관심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관심은 특히 더 낮고 더 가난하고 더 힘없는 사람들에게 쏠립니다. 그리스도를 따라 우리도 기아와 곤궁과 무지로 고통받는 군중에게 연민을 느낍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다그치고 있습니다.(2코린 5,14)”(제2차 바티칸 공의회 개막 메시지)


인간의 구원은 분명 하느님께 달렸음에도 2천 년 동안 교회는 줄기차게 교회 안에 있다고 가르쳐 왔습니다. 그리하여 “유다인도 그리스인도 없고, 종도 자유인도 없으며, 남자도 여자도 없습니다.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입니다”(갈라 3,28)라는 명백한 가르침을 잊고, ‘가톨릭 교회에서 세례받지 않은 사람에게는 구원이 없다’는 오류를 가르친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오만의 무서운 단죄와 이단의 죄를 씌워 칼을 휘두른 것입니다. 그러나 자비로우신 성령께서는 교회의 오류를 일깨워 주셨고, 교회가 구원의 참 신비와 구원의 주체가 하느님이심을 비로소 깨닫게 해주셨습니다. 그리하여 가톨릭교회는 위대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통하여 이렇게 만천하에 구원의 참된 복음을 밝히게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생명과 호흡과 모든 것을 주시고(사도 17,25-28 참조), 구세주께서 모든 사람이 구원받게 되기를 바라시기 때문이다.(1티모 2,4) 사실, 자기 탓 없이 그리스도의 복음과 그분의 교회를 모르지만 진실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찾고 양심의 명령을 통하여 알게 된 하느님의 뜻을 은총의 영향 아래에서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영원한 구원을 얻을 수 있다.”(「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 교회헌장, 제16항)

과연 교회 또한 하느님의 거대하고 웅장하며 장엄한 구원의 방주에 무임승차하고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구원을 향한 생명의 물줄기는 늘 아래로 흐르고 있다’는 단순한 진리를 드디어 깨달은 것입니다. 또한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이 명백히 가르쳐 주는 계시의 진리 역시 ‘구원의 보편성’이었다는 것도 깨달았습니다. 과연 하느님께서 그토록 원하신 것이 ‘만민의 구원’이었음을 교회가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세우신 우리 교회의 이름이 ‘가톨릭’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깨달았습니다. 가톨릭이라는 이름이 바로 보편된 구원을 일컫는 이름이었던 것입니다. 가톨릭이라는 이름은 하느님께서 지어주신 은총의 이름이면서 우리의 지상 사명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밝히고 있는 이름입니다. 이 이름 앞에는 세상 그 어떤 것도 소외되거나 열외가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요나가 다시 말을 건넵니다.

“사실 저 또한 구원에 대하여 우리 민족에게만 주어진 특권으로 여겼습니다. 아주 편협된 이기적인 구원관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저 큰 도시 니네베로 가서 복음을 전하라 하실 때, 그리고 그 뜻을 따랐을 때 구원의 보편성을 깨달은 것입니다. 진정 구원은 주님에게서 오고, 구원의 문은 만민에게 열려 있었습니다.”
 

글 _ 배광하 신부 (치리아코, 춘천교구 미원본당 주임)
만남의 인연을 소중히 여기는 배광하 신부는 1992년 사제가 됐다. 하느님과 사람과 자연을 사랑하며, 그 교감을 위해 자주 여행을 떠난다.
삽화 _ 김 사무엘
경희대학교 미술교육과를 졸업했다. 건축 디자이너이며, 제주 아마추어 미술인 협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제주 중문. 강정. 삼양 등지에서 수채화 위주의 그림을 가르치고 있으며, 현재 건축 인테리어 회사인 Design SAM의 대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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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5-0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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