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아직 공생활을 시작하시기 전 나자렛에서 북동쪽으로 약 6㎞쯤 떨어진 카나의 혼인잔치에 성모님과 함께 가셔서 보여주신 첫 기적 이야기입니다. 묵주기도 빛의 신비 두 번째에 카나에서 첫 기적을 행하심을 묵상하듯이 그 의미는 중요하고도 깊습니다.
복음을 보면 잔치가 끝나지 않았는데 포도주가 떨어졌고, 성모님은 아들 예수님께 “포도주가 없구나” 하고 도움을 청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처음에는 “여인이시여, 저에게 무엇을 바라십니까? 아직 저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하고 완곡하게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성모님은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 하시며 예수님께서 해결해주시리라 믿고 일꾼들에게 분부합니다.
예수님께서 “물독에 물을 채워라” 말씀하시니 그 물은 포도주로 바뀝니다. 아직 때가 되지 않았음에도 모든 시기와 절차를 초월하시는 사랑이 많으신 예수님과 성모님의 전구하심이 놀랍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머니 성모님의 말씀에 소홀할 수 없으셨던 것이지요. 카나에서의 예수님과 성모님을 묵상하며 우리는 기도생활의 모범을 배웁니다.
얼마 전 저는 하느님께서 간절한 기도를 들어주시는 기적 같은 체험을 하였습니다. 이번 체험에 의하면 하느님께서는 옳고 그름을 떠나 얼마나 간절히 기도하느냐를 먼저 보시는 것 같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죄 가운데서도 선으로 이끄시어 당신 뜻을 이루신다고 생각됩니다. 따라서 기도할 때는 인간적 판단으로 ‘정말 이루어질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을 버리고 하느님께 간절히 의탁하는 것이 먼저입니다. 간절한 기도는 주님께서 반드시 들어주신다고 저는 확신합니다.
어려움에 처한 분들 중에 사제인 저에게 기도를 부탁하는 교우들이 종종 있습니다. 함께 열심히 기도하고 최선을 다해 노력하면, 그 지향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일부는 나중에 뒤돌아서서 ‘운이 좋았다’거나 ‘내가 열심히 노력했기 때문’이라고 자만하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결국 기도는 이루어졌지만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렇듯 기도의 응답이나 기적은 그 자체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 온전한 믿음을 갖게 하는 도구일 뿐입니다. 기적은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고 주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게 하려는 것입니다.
오늘 요한 복음에서는 기적이라 하지 않고 표징이라고 합니다. 물이 포도주로 변한 것은 기적이라 할 수 있지만, 그것을 통해 알려주시는 주님의 깊은 뜻이 표징입니다. 따라서 기적에 관심을 갖기보다는 그 기적을 통해 가르쳐주시는 표징을 잘 깨달아야 합니다.
모든 것을 다 쏟아 바치는 정성된 기도에는 사랑이 담겨 있습니다. 사랑이 가득 차 있을수록 그 기도는 더 가치 있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사랑으로 포도주가 떨어진 것에 마음 쓰셨고, 예수님께 도움을 청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랑으로 당신의 때가 되기도 전에 기적을 일으키셨습니다. 결국 기적을 일으키는 것은 사랑입니다. 그리고 기적이 가르치는 표징은 바로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고통과 바람과 상처와 눈물과 부족함을 다 아십니다. 이 모두를 사랑의 기적으로 해결해주고자 하십니다. 하지만 간절한 기도를 들어주시고 기적이 일어나는 것으로 끝은 아닙니다. 참된 신앙인은 주님 사랑의 표징을 깨닫고 감사하며 복음적 생활로 응답해야 합니다.
이계철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