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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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림을 배우게 해 준 꽃

[월간 꿈 CUM] 꿈CUM 수필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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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여 년 전 친구가 제주도에서 얻어 왔다며 손바닥 안에 들 정도의 작은 문주란 한 그루를 주었습니다. 여름에 향긋한 순백의 꽃을 피운다니 잘 길러 보라고 하면서요.

저는 우정이 담긴 그 귀한 선물, 문주란을 애지중지 길렀습니다. 물을 줄 때마다 친구를 생각하게 됨은 어쩔 수 없었지요. 그 친구에게 좋은 일이 있을 때는 화분 곁에서 함께 기쁨을 나누며, 궂은일이 있을 때는 화분 곁에서 함께 아파하고 기도하며 고이고이 길렀습니다. 그 화분 옆에는 군자란 화분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해마다 군자란은 잘도 피건만 이 문주란은 십수 년이 지나도 쉽사리 꽃을 보여 주지 않았습니다.
 


군자란보다 훨씬 큰 키에 몸피도 제법 도톰해졌고 잎도 너부죽하게 자라, 아무리 봐도 방년(芳年)의 나이는 찼건만 영 꽃을 피우지 않았습니다. 비좁은 화분에서 뿌리가 답답해할까 봐 그 새 몇 번 화분도 바꿔 주었고, 이사할 때마다 조심조심 보듬어다 볕 좋은 자리에 앉혀 주었건만 세월이 가도 꽃 소식이 없었습니다.

언젠가는…, 언젠가는…. 저는 끈기 있게 기다리며 정성을 다했습니다. 봄에는 분갈이도 해 주고, 여름에는 아파트 단지 앞으로 내려놓아 바람과 햇볕을 쐬어 주고, 단비도 맞혀 주고, 가을이면 다시 베란다로 옮겨오고, 겨울이면 얼른 거실 안으로 들여오고….

그도 그럴 것이 여름이면 어찌나 진딧물이 끼는지, 햇볕으로 내어놓지 않고는 당해낼 재주가 없었거든요. 힘들어도 밖으로 내놓으면 진딧물이 사라지고 싱싱하게 잘 자라 키가 훌쩍 크고 했거든요. 또 겨울에는 그냥 베란다에 두었다가 넙죽한 잎이 얼어버려 깜짝 놀란 일이 있었거든요. 아무튼 제 딴엔 온갖 정성을 쏟으며 꽃을 기다렸지요.

아, 그런데 말입니다. 20여 년이 넘은 어느 해 꽃대가 올라왔습니다.
 


쑥쑥 튼실한 대공이 날마다 위로 뻗어 올랐습니다. 족히 한 자 길이로 뻗어 올랐습니다. 아, 드디어, 드디어, 저는 기쁨으로 가슴이 설레었습니다. 그러기를 며칠, 대공 끝에 맺혔던 봉오리가 입을 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 둘, 꽃들이 피어났습니다. 한 송이가 아닌 여러 날개의 가느다란 꽃이 한데 어울려 피어났습니다. 꽃송이라기보다 꽃술 같았어요. 신기해서 바짝 다가가 바라보자니 그 향내 또한 어찌나 달콤하던지요.

저는 20여 년 넘게 쏟은 정성에 보답해 준 꽃송이를 어루만지며 속삭였습니다.

“고마워! 기다림을 배우게 해 준 꽃, 나의 문주란!”

그 뒤 문주란은 한 해도 거르지 않고 꽃을 피웁니다. 한 대도 아니고 두 대씩이나 피웁니다. 금년에도 그 꽃대 오르는 것을 보면서, 실오라기 같은 꽃술을 보면서, 그 아릿한 향내에 취하면서 더운 여름을 행복하게 보냈습니다.

자녀가 내 속을 태운다구요? 배우자가 내 속을 태운다구요? 부모님이 내 속을 태운다구요? 가까운 친척이나 이웃이 내 속을 태운다구요?

우리 너무 조급하게 생각지 맙시다. 그들이 변해 주기를 바라기 전에 내가 먼저 그들을 위해 관심과 사랑을 쏟아 봅시다. 때가 되면 반드시 향긋한 꽃을 피워 우리의 사랑에 보답할 것입니다.
 

스위스 제네바 영국공원 꽃시계

 


글 _ 안 영 (실비아, 소설가)
1940년 전남 광양시 진월면에서 출생했다. 1965년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했으며, 장편소설 「만남, 그 신비」, 「영원한 달빛, 신사임당」, 소설집 「둘만의 이야기」 「치마폭에 꿈을」 수필집 「나의 기쁨, 나의 희망」 동화 「배꽃마을에서 온 송이」 등을 펴냈다. 현재 한국문인협회, 국제펜 한국본부, 한국소설가협회, 한국여성문학인회, 가톨릭문인회 회원이다. 한국문학상, 펜문학상, 월간문학상, 한국소설문학상, 중앙대문학상, 제1회 자랑스러운 광양인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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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5-0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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