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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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원 밝혀주는 ‘고향’을 잊으면 누가 우리를 지켜줄까

[김용은 수녀의 오늘도, 안녕하세요?] 103. 고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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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모두에겐 고향이 있다. 그곳은 우리의 근원이며 어머니이다. 설을 앞두고 어린이들이 세배하는 법을 배우고 있다. 뉴시스


“나는야 흙에 살리라. 부모님 모시고 효도하면서 흙에 살리라.” 오래전 홍세민이 부른 ‘흙에 살리라’는 “정든 고향 땅, 흙에서 살면 모든 것이 다 내 것인데 왜 고향을 두고 가는지 알 수 없다”고 말한다. 한때 흙과 고향을 두고 도시로 떠난 젊은이들이나 흙을 지키며 사는 어른들에게 모두 위로와 힘이 되어준 노래가 아닌가 싶다. 떠난 이에게는 고향을 돌아보게 해주고, 남은 자에게는 흙을 지키는 소명에 감사하게 한다.

흙은 모든 생물의 고향이다. “너는 흙에서 나왔으니 흙으로 돌아가리라.” 흙은 우리의 근원이자 우리가 돌아가야 할 최후의 자리다. 돌아간다는 것은 단순히 물리적 이동을 넘어 근원으로의 회귀다. 우리가 설 명절에 고향으로 돌아가는 행위는 우리의 근원으로 돌아가는 거룩한 의식이다. 고향에 대한 그리움은 나의 근원에 대한 갈망이고 내 삶의 첫 시작으로 돌아가고 싶은 순수하고 인간적인 간절한 바람이다.

하지만 현대는 여러 가지 이유로 고향을 찾는 일이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단지 지리적 공간인 고향만이 아니라 마음속 근원의 고향을 돌아볼 여유도 없다. 우리가 사는 도시 어디를 보아도 흙이 보이지 않는다. 실용의 편리함에 안주하다 보니 흙을 잃어가고 있다. 숫자로 가득한 디지털 공간에서 분주하게 살아가면서 ‘흙’도 ‘고향’도 잊히는 것이 아닐까?

우리가 매일 살아가는 디지털 대륙에는 땅이 사라지고 고향을 잊게 하면서 고귀함과 인간다움마저 희미해지는 것 같다. 사실 고향에 대한 그리움은 생명을 품고 낳아 키워주는 땅과 어머니에게로 돌아가는 행복의 관문일 텐데 말이다.

생물학자인 에드워드 윌슨(Edward O. Wilson)은 인간은 생물학적 존재로서 자연과 함께할 때 안정감을 찾는다고 한다. 철학자인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또한 현대인의 불안은 자연과의 단절에 그 원인이 있다고 했다. 흙 향기만 맡아도 신경계의 과잉흥분을 억제하고 스트레스 호르몬인 코르티솔을 감소시켜준다고 한다. 흙을 만지는 행위는 세로토닌과 도파민 분비를 촉진해 우울증을 완화시켜주고 불안감을 줄여준다고도 한다. 현대인이 불안증과 불면증에 시달리는 이유가 흙과 점점 멀어지기 때문일 것이다. 그 어느 때보다 행복을 갈망하지만 빠르고 자극적으로 얻어낸 행복은 그만큼 또 빠르게 사그라진다. 버튼만 누르면 찾아오는 행복은 코드만 빼면 사라진다. 그렇게 급히 왔다 간 자리에는 공허한 흔적만이 커다랗게 남는다.

우리 모두에게는 분주하게 가던 길을 잠깐 멈춰 돌아보아야 할 ‘고향’이 있다. 살다 보면 체념과 절망의 늪에 빠져들 때가 있다. 그럴 때일수록 우리는 돌아가서는 안 될 것 같은 집착과 아집에 빠지게 된다. 도박이나 인터넷 중독으로 폐인이 되어 ‘멈출 수 없다’고 한다. 그리고 가족이나 이웃 간에 큰 상처를 주고는 ‘갈 때까지 갈 수밖에 없다’고 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렇게 마냥 가기만 하다 보면 돌아오기에는 너무도 먼 길로 들어서게 된다는 사실이다. 마음이 불편하고 아플 때는 더욱 멈춰 돌아보고 때로는 용감하게 발길을 돌려야 한다. 빈손으로 태어난 곳, 아무것도 없이 빈손으로 시작했던 순수한 ‘첫 자리’에는 처음에 품었던 ‘열정’의 맥이 뛰고 모태의 에너지가 흐른다.

편리한 디지털 대륙에서 살면서 우리 근원을 밝혀주는 ‘고향’을 잊고 생명의 어머니인 ‘흙’마저 지켜내지 못한다면 누가 우리를 지켜줄까? ‘흙’으로 사람을 빚으시고 생명의 숨을 넣어주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내리시고 지켜주실까?(민수 6,24 참조) 우리를 데려다 지구 정원에 두시어, 그곳을 일구고 돌보게 하신(창세 2,15 참조) 주 하느님께서는 ‘고향’을 떠나 ‘흙’을 지켜내지 못한 우리에게 복을 주시고 지켜주실지 묻게 되는 설날이다.



<영성이 묻는 안부>

영화 사상 최고 걸작으로 평가되는 오슨 웰즈의 ‘시민 케인’의 오프닝에서는 ‘장미꽃 봉오리(Rosebud)’라는 말의 비밀을 찾아 주인공 케인의 생애를 플래시백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케인은 대단한 권력과 명예를 모두 움켜쥐고도 비참하리만큼 외롭고 고독하게 죽음을 맞이하지요. 그 이후 영화는 여러 증인을 통해 케인의 생애를 돌아보면서 ‘장미꽃 봉오리’에 대한 비밀을 밝히려 하지만 끝내 찾아내지 못합니다. 그리고 영화가 끝날 무렵 케인이 어린 시절 즐겨 탔던 썰매가 불구덩이 속에서 뒤집어지면서 ‘장미꽃 봉오리’라는 글귀가 보이지요.

그때 우리는 알게 됩니다. 장미꽃 봉오리는 케인이 그리워했던 고향이며 어머니이고 자신의 근원이었다는 것을요. 권력욕과 정치적 야망을 놓지 못한 케인은 끝내 자신과 화해하지 못하고 홀로 외롭게 세상을 마감합니다. ‘장미꽃 봉오리’는 가난했지만 행복했던 어린 시절, 자신을 있는 그대로 품어주었던 고향의 땅과 어머니 그리고 돌아가고 싶었던 자신의 근원이었던 거지요. 우리에게도 분명 돌아가야 할 곳이 있습니다. 처음 태어나 나를 부양하고 품어주었던 ‘고향’이며 ‘어머니’일 것입니다. 설날은 고향으로 돌아가는 날입니다. 물리적인 장소만이 아닌 내 몸과 영혼이 태어난 곳, 내 자신의 근원을 밝혀주는 하느님 품으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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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5-0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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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 23장 4절
내가 그들을 돌보아 줄 목자들을 그들에게 세워 주리니, 그들은 더 이상 두려워하거나 당황하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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