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네딕토 16세 교황께서는 회칙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Deus Caritas Est)에서 ‘에로스’적 사랑과 ‘아가페’적 사랑의 관계를 상세하게 설명하십니다. 에로스와 아가페는 같은 사랑의 서로 다른 측면이며, 하느님의 사랑도 이 두 가지 요소를 다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가페적 사랑’을 말하는 교회의 가르침이 ‘에로스적 사랑’을 부정하는 것으로 잘못 받아들여져 왔습니다.
계몽주의 이후, 독일 철학자 니체가 “그리스도교가 에로스를 독살하였다”라고 비판하였듯이, 마치 교회가 계명과 금지를 가르치면서 삶의 가장 아름다운 것을 쓰디쓴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는 의구심과, 창조주의 선물인 남녀 간의 사랑을 부정적인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는 인식이 팽배해 있습니다.
교황께서는 이러한 비난은 오해이며, 신을 향해서 오르는 힘으로서의 에로스를 과거 고대 종교가 그릇되게 신격화하고 왜곡시켜 타락으로 이끄는 것을 구약 성경이 맞서 왔고, 신약 성경과 그리스도교도 에로스를 거부한 것이 아니라 에로스의 진정한 위대성을 회복시키기 위해서 에로스의 절제와 정화를 추구해 온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인간은 육체와 영혼으로 이루어진 존재로서 육체적 쾌락만으로는 인격적 존재인 인간 전체를 생생하게 드러낼 수 없으며, 육체와 영혼이 긴밀히 일치될 때 비로소 참된 자신이 될 수 있음을 강조해 왔습니다. 그런데 현대에 이르러 신적인 사랑을 추구하는 동력인 에로스가 단순히 육체를 통한 ‘성적 쾌락’으로 전락하고 상품화된 점은 매우 아쉬운 일입니다. 이런 경향은 정화되고 상승한 에로스가 영적 충만함 속에서 정신과 육체의 통합을 이루는 ‘새로운 고귀함’에 이르는 길을 차단합니다. 에로스가 타인을 위한 사랑인 아가페로 성숙하지 않으면 그 사랑은 타락하여 고유한 본성조차 잃어버리게 됩니다.
‘에로스’가 정화되고 성숙하여 ‘아가페’로 나아가듯이, 남녀의 사랑도 처음에는 자신을 중심으로 상대방을 갈망하는 에로스적인 사랑에서 시작합니다. 그리고 점차 사랑하는 이를 염려하고 배려하며 그의 행복을 추구하는 아가페적인 사랑으로 성장합니다.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마태 16,25),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중략)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2,24)라는 복음 내용 또한 에로스가 성숙하여 아가페적 사랑의 본성을 드러낸다는 말씀입니다. 이때 사랑은 ‘결정적인 사랑’이 되고, ‘영원’을 만나며, ‘최고의 경지’(extasis)에 다다릅니다. 이 사랑은 자신만을 추구하는 닫힌 자아에서 벗어나 온전히 자기를 내어 줌으로써 자아를 해방합니다. 그리하여 진정한 자아를 발견하고, 하느님을 만나 일치하는 ‘최고의 경지’를 체험합니다.
‘에로스’와 ‘아가페’는 ‘가지려는 사랑’(자신을 위한 관심)과 ‘내어 주는 사랑’(타인을 위한 헌신)으로 대비하여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사랑은 분리될 수 없으며 동시에 서로 다른 차원을 지닌 하나의 실재입니다. ‘아가페’가 없는 ‘에로스’는 결국 타락하게 되고, ‘에로스’가 없는 ‘아가페’만으로는 인간적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두 차원이 완전히 분리될 때 ‘기이한 모습이 되거나 가장 빈약한 형태의 사랑으로 전락’하게 됩니다. 성경에서 드러나는 신앙은 인간을 새로운 차원의 사랑으로 이끌어 줍니다.
교회는 젊은 연인들이 서로에게 느끼는 성적 매력으로서의 ‘에로스’ 차원에 머물지 않고, 사랑하는 이의 행복을 추구하고 배려하며 자기를 내어 주는 가운데 두 인격의 온전한 일치를 추구하는 ‘아가페’로 성장함으로써, 사랑이신 하느님을 만나는 최고의 경지를 체험하도록 이끌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에로스와 아가페가 통합된 사랑에서 연인들은 상대방을 자신의 즐거움을 위한 도구로 여기는 관계에서 벗어나 둘이 하나가 되고자 헌신하고 증여하는 관계로 나아갑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에로스이며 동시에 아가페이신, 하느님의 참사랑을 체험하는 참된 부부로 성장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