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월 27일
사목/복음/말씀
전체기사 지난 연재 기사
온유

[월간 꿈 CUM] 테마로 읽는 성경 (1)

폰트 작게 폰트 크게 인쇄 공유


신학생 시절 들은 학장 신부님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종종 함께 탁구 게임을 하는 성격이 아주 온유한 신부님이 계시는데, 급한 성격의 학장 신부님께서 그 성격대로 아무리 매서운 공격을 퍼부어도 공격은 하지 않으면서 공을 슬슬 받아넘기기만 하는 신부님을 한 번도 이기지 못한다는 말씀이었습니다. 계속 공격하다가 결국 힘이 빠져 헛손질해서 지고 만다는 것이었죠.

온유는 나약함이 아닙니다. 오히려 온유는 강한 내적 힘이 외부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온유는 단지 불편한 말을 하지 않고 찡그린 얼굴을 보이지 않음으로써 다른 사람과의 갈등을 피하려 택하는 손쉬운 태도가 아닙니다.

하느님은 온유한 분입니다. 비록 하느님의 온유한 속성이 명시적으로 언급되는 구절은 얼마 되지 않고, 성경의 많은 부분은 오히려 그와 반대되는 하느님의 모습을 드러내는 듯하지만 말입니다.

하느님의 온유함은 성경의 첫 장에서부터 발견됩니다. 창세기에는 두 개의 창조 이야기가 담겨 있는데, 이 가운데 두 번째 이야기는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염려와 배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때에 주 하느님께서 흙의 먼지로 사람을 빚으시고.”(창세 2,7)

우리말 성경이 흙먼지로 번역한 히브리 단어 ‘아다마’는 찰흙으로 옮길 수도 있습니다. 찰흙을 빚어본 사람은 알겠지만, 이 작업은 섬세함과 부드러움이 요구되는 일입니다. 찰흙을 거칠고 투박하게 다루었다간 원하는 형상을 만들지 못하고 낭패 보기 십상이죠. 이렇게 인간 창조는 하느님의 놀라운 권능이 아니라 부드러운 손길의 결과물입니다. 그러니 우리 인간 존재 자체가 하느님 온유의 결정적 증거입니다.
 

이탈리아 카프리 섬, 산 미켈레 성당 바닥의 마졸리카(도자기 타일화) ‘에덴동산’

 


“주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데려다 에덴 동산에 두시어, 그곳을 일구고 돌보게 하셨다.”(창세 2,15)

이 말씀은 하느님께서 소작농에게 땅을 배당하는 지주와 같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말 성경에 ‘데려다’로 번역된 단어는 직역하면 ‘잡다’가 되는데, 어머니가 갓 태어난 아기를 손으로 조심스럽게 잡는 것과 같은 몸짓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주 하느님께서는 사람에게 이렇게 명령하셨다. ‘너는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에서 열매를 따 먹어도 된다. 그러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서는 따 먹으면 안 된다. 그 열매를 따 먹는 날, 너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창세 2,16-17)

우리말 성경에 ‘명령’으로 번역된 단어는 ‘처방’으로 옮길 수도 있습니다. 명령과 처방은 다릅니다. 주차 금지구역에서 차를 빼라는 경찰의 명령과 잃어버린 건강을 되찾게 해주려는 의사의 처방은 명확히 다르죠. 명령은 무뚝뚝하지만, 처방에는 온유함이 있습니다. 흔히 이 말씀을 엄격한 금지 명령으로만 생각하지만, 하느님의 말씀은 선악과의 금지가 아니라 인간이 살기 위해서 먹어야 하는 대부분 열매의 허용이 우선한다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저주처럼 보이는 금지 명령도 단어 자체보다 그 어조에 유의해야 합니다. 이 말씀은 마치 어머니가 어린아이에게 아직은 소화할 능력이 없어서 크게 탈이 날 수 있는 음식을 주의하라고 강하게 경고하는 것과 같이 이해될 수 있습니다. 선과 악에 대한 엄청난 지식을 주는 열매는 그것을 감당할 수 있는 튼튼한 위장을 갖기 전까진 먹어선 안 됩니다. 아직 어린 인간에게는 이 열매를 먹는 것이 금지되었지만, 인간이 성장하게 되면 그 열매를 맛볼 수 있는 것입니다.

원죄 이야기에서 어떤 이들은 당신의 명을 거스르는 죄를 지은 인간을 저주하시는 하느님의 무서운 모습만을 기억할지도 모릅니다. 인간이 죄를 지어 하느님께서 인간에 대한 태도를 온유에서 분노로 바꾸신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 저주 밑에는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온유가 여전히 자리하고 있습니다.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저주 이후에도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가 끊어지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즉, 저주는 하느님께서 인간을 포기하시거나 버리시기 위해 내리신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오히려 원죄로 손상된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온전히 회복하려는 훈육을 위한 조치였습니다. 회초리가 사랑의 매가 될 수 있는 것처럼 말이죠. 이렇게 하느님의 온유는 단순히 온화하고 부드러운 성격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분노조차도 그분의 온유를 드러내는 방법입니다.

누군가는 하느님께서 선악과를 에덴동산에 두시고는 인간이 먹는 것을 금지하신 것은 덫을 놓으신 것이 아닌가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만일 그렇다면, 덫을 놓고 인간이 걸려들기를 기다리며 사악한 웃음을 짓는 하느님의 모습에서 온유함을 찾을 수는 없겠죠.

하지만 이 또한 하느님의 온유를 드러냅니다. 여기서 드러나는 것은 아버지의 온유함입니다. 언젠가는 결국 자신의 모든 재산을 자녀에게 물려주겠지만, 단계별로 자녀가 감당할 수 있는 만큼씩 선물하는 아버지의 온유함 말입니다.

어린아이에게 단번에 차 열쇠를 선물하는 아버지는 없습니다. 인간이 성장하면 하느님은 언젠가는 선악과를 그에게 허락했을 것입니다.


글 _ 함원식 신부(이사야, 안동교구 갈전마티아본당 주임, 성서신학 박사)
1999년 사제서품 후 성경에 대한 전문적인 연구를 위해 프랑스로 유학, 파리 가톨릭대학교(Catholique de Paris)에서 2007년 ‘요나서 해석에서의 시와 설화의 상호의존성’을 주제로 석사학위를, 2017년 ‘욥기 내 다양한 문학 장르들 사이의 대화적 관계’를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기사원문보기]
가톨릭평화신문 2025-01-24

관련뉴스

말씀사탕2025. 1. 27

시편 143장 8절
당신을 신뢰하니 아침에 당신의 자애를 입게 하소서.
  • QUICK MENU

  • 성경
  • 기도문
  • 소리주보

  • 카톨릭성가
  • 카톨릭대사전
  • 성무일도

  • 성경쓰기
  • 7성사
  • 가톨릭성인


GoodNews Copyright ⓒ 1998
천주교 서울대교구 · 가톨릭굿뉴스.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