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2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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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 교부에게 배우는 삶의 지혜] 머물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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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 교부들의 금언 모음집을 읽다 보면 ‘독방에 머물라’는 권고를 자주 접하게 된다. 이 권고는 특히 사막으로 물러나 수도승 생활을 시작하는 초심자나 아직 경험이 부족한 젊은 수도승에게 주어지는 권고다. 독방에 항구히 머무는 자체가 하나의 중요한 수행으로 간주됐다.


독방에 머무는 수행


누군가 압바 비아레에게 “제가 구원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고 묻자 “근심 없이 당신 독방에 머무십시오. 그러면 구원될 것입니다.”(비아레 1)라고 말했다. 또 구원을 위한 말씀을 청한 형제에게 압바 히에락스도 비슷한 권고를 하였다. “당신 독방에 머무르십시오. 배고프면 먹고, 목마르면 마시도록 하시오. 단지 누구에게든 악한 말은 하지 마십시오. 그러면 구원될 것입니다.”(히에락스 1) 독방에 머무는 자체가 마치 구원에 중요한 수단인 듯한 인상마저 준다.


독방을 떠나려는 유혹이 들 때, 원로에게 가서 자기 생각을 털어놓으면 돌아오는 권고는 언제나 ‘독방에 머물러 있으라’는 것이었다. 때때로 이런 말이 덧붙는다. “가서 먹고 마시고 잠을 자고 일하지 마시오. 다만 독방을 떠나지는 마시오.”(아르세니우스 11) 이 권고에 놀라 또 다른 원로를 찾아가도 마찬가지다. 오히려 한술 더 떠 “전혀 기도하지 마십시오. 오로지 독방에만 머무르십시오”(파프누티우스 5)라고 말하기까지 한다. 


독방을 나가려는 유혹에 대한 원로들의 처방은 한결같았다. 즉 독방에서 무슨 일을 하든 절대 독방을 떠나지 말고 거기에 항구히 머물라는 것이었다. 이 권고가 우리에게는 무척 낯설고 무의미하게까지 들릴 수도 있다. ‘단순히 독방에 머무는 것 자체가 과연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라는 의문을 자아내기 충분하다. 하지만 그들은 이것을 왜 그토록 중요한 수행으로 간주하여 권고했을까?


독방에 머무는 이유


이 권고는 사막 인구가 증가하던 시대에 나왔다. 이런 상황에서 오직 하느님과 홀로 있기 위한 유일한 수단은 자기 암자에 은둔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고독 속에서 하느님을 찾으러 사막에 왔다. 사막에 항구하기 위해서는 어떤 희생을 치르고라도 독방의 고독 속에서 생활해야만 했다. 핵심은 자기 독방에서 하느님을 발견할 수 없다면 어디서도 하느님을 발견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독방은 그들의 금욕생활에서 매우 중요했다. 압바 모세는 어떤 형제가 한 말씀을 청하자 이렇게 말했다. “가서 당신 독방에 앉으십시오, 그러면 독방이 모든 것을 가르쳐줄 것입니다.”(모세 6) 그들은 독방에 항구히 머무는 것이 수도승을 올바른 길에서 벗어나지 않게 해준다고 믿었다.


독방에 머무는 수행은 정주(定住)와도 관련된다. 정주란 한곳에 항구히 머무는 것으로, 우리가 하느님 안에 깊이 뿌리내리기 위해 필요한 수행이다. 여기에는 하느님을 향한 갈망과 사랑, 깊은 신앙이 전제되며, 무엇보다도 인내와 끈기가 요구된다. 정주는 베네딕도회 수도승이 서약하는 삼대 서원 중 하나이기도 하다. 여기저기 떠돌아다니지 않고 한곳에 정착하여 기도하고 일하는 단순한 삶을 통해 하느님을 찾겠다는 약속이다. 사실 여기저기 이식(移植)된 나무는 뿌리를 내리지 못하듯이 이곳저곳 떠돌아다니는 수도승도 하느님 안에 깊이 뿌리를 내리지 못하게 된다. 그래서 한곳에 머무는 것은 중요하다.



유혹자와의 싸움


수도승을 독방에 머물지 못하게 하는 가장 큰 적은 아케디아(akedia)다. 이는 단조롭게 반복되는 일상에서 쉽게 찾아오는 권태나 지루함, 무기력 혹은 나태라 하겠다. 이레네 하우스헤르에 의하면, “모든 악령 가운데 가장 견디기 힘든 아케디아와 대적하는 데는 큰 용기와 영웅적인 인내가 필요하다는 것을 교부들은 알고 있었다. 


아케디아는 정주에 권태를 느끼게 하는 특별한 재주가 있다.”(「사막 교부 이렇게 살았다」, 134~135) 고독과 권태의 버거움을 다른 곳으로 돌리고 회피하기 위해서 독방 밖으로 나가려는 끈질긴 유혹에 저항하면서 독방에 머무는 것이 중요했다. 이것이 수도승이 견뎌야 할 가장 힘든 싸움이었다.


외출의 유혹은 강하게 엄습했고 온갖 구실로 다가왔다. 한 형제는 9년 동안 독방을 떠나고 싶은 유혹을 받았다. 그는 매일 떠나기 위해 외투를 준비했고, 저녁이면 “내일 떠나야지!” 하고 말했다. 이튿날엔 “주님을 위해 오늘도 여기 머물러야지!”라고 했다. 9년 동안 이렇게 하자 하느님께서는 그에게서 모든 유혹을 거두어 주셨고 그는 평온을 되찾았다.(같은 책, 135)


참된 머무름


독방에 머무는 것 자체가 전부는 아니다. 압바 암모나스는 말한다. “사람은 독방에 백년을 머물면서도 독방에서 사는 법을 배우지 못할 수 있습니다.”(포이멘 96) 참된 머무름은 몸으로뿐 아니라 마음으로 머무는 것이다. 몸으로 독방에 머물면서 밖의 세상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이미 독방을 떠난 것이었다. 


압바 요한의 다음 말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누군가 자기 영혼 안에 하느님의 도구들을 가지고 있다면, 이 세상의 도구들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더라도 독방에 머물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의 도구들을 가지고 있는 누군가가 하느님의 도구들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그는 여전히 독방에 머물기 위해 세상의 도구들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도구도, 이 세상의 도구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은 결코 독방에 머물 수 없습니다.”(요한 콜로보스 44)


참된 머무름은 또한 그리스도 안에 머무는 것이다. “내 안에 머물러라. 나도 너희 안에 머무르겠다”(요한 15,4)라고 말씀하신 그분 안에 머무는 것이다. 그분 안에서만 우리는 참된 열매를 맺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사막 교부들이 그렇듯 독방에 항구히 머물라고 한 것은 결국 그리스도 안에 항구히 머물라는 권고일 것이다. 


프란치스코 교종도 한 강론에서 주교, 사제, 수도자, 신학생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우리는 하느님에게서 부르심을 받았고 예수님과 일치하여 그분과 함께 머물라고 부르심 받았습니다. 사실 그리스도 안에 살기, 머물기는 우리의 존재와 우리가 하는 일 전부를 특징짓습니다.”(「만남의 신비학을 살아가세요 I」, 74)


마음으로 그리스도 안에 확고히 머물라는 이 권고는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하다. 우리는 마음이 불안하고 공허하여 늘 부평초처럼 떠다니고 있지는 않은가? 사막 교부들은 그런 우리에게 ‘머물러라!’고 권고하며 마음으로 내려가 그리스도 안에 중심을 잡고 이리저리 떠다니지 말라고 촉구하고 있는 듯하다.



글 _ 허성석 로무알도 신부(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수련원장)


이주연 기자 miki@catime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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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25-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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