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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 성당 스케치] 필리포 브루넬레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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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세기와 14세기 문학과 미술, 건축 분야에서 활동했던 피렌체 사람들 덕분에 15세기에 들어 새 시대의 여명이 밝아왔습니다. 그렇게 새로움에 대한 기대로 세상의 관심이 피렌체로 집중되고 있을 때, 피렌체를 떠나 폐허가 된 고대 로마의 유적들 사이를 헤집고 다니는 두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그중 하나는 아직 10대의 얼굴을 하고 있었는데 함께 로마에 온 20대의 청년을 꽤 의식하는 듯 보였습니다. 그들은 당시에 피렌체에서 유행했던 인문주의에 관심이 많았던 금세공 기술자들입니다. 그런데 청년이 자신에 대한 실망을 감추지 못하고 로마로 떠나자, 소년도 그 길을 따라나선 것입니다.


세상이 싫은 청년은 훗날 피렌체 대성당에 붉은색 돔을 올려 새 시대의 도래를 증명할 필리포 브루넬레스키(Filippo Brunelleschi·1377-1446)입니다. 그리고 궁금한 것이 많은 소년은 바르젤로 미술관의 청동 다윗상으로 곧 세상을 놀라게 할 도나텔로(Donatello·1386-1466)입니다. 후대에 이들은 마사초(Masaccio·1401-1428)와 함께 르네상스 미술의 3대 ‘창시자’로 인정받습니다.



도나텔로는 고전을 잘 표현하는 훌륭한 조각가로 성공하고 싶은 꿈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고대 로마의 건축물을 찾아다니며 조각상들을 연구하고, 무너진 유적들 사이를 파헤치며 부서진 조각상도 허투루 넘기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도 도나텔로는 뭔가를 마음속에 숨겨 놓고 드러내려 하지 않는 열 살 위의 브루넬레스키가 신경이 쓰였습니다. 더구나 브루넬레스키는 까다로운 사람이어서 지금 그가 하는 일과 생각이 궁금하여도 감히 물어보지 못했습니다. 아무튼 피렌체에서 이미 이름이 알려진 그가 로마까지 와서 자신과 같은 조각 분야의 연구를 한다는 것은 큰 부담이었습니다.


하지만 도나텔로의 우려는 브루넬레스키의 생각과는 거리가 있었습니다. 브루넬레스키는 보통 사람들이 예견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 마음 깊이 결심한 바가 있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지금 큰 고통을 감수하고 있는 것입니다. 단지 짐작이 가는 한 가지는, 당시 피렌체 사람이면 누구나 알고 있는 사건으로 브루넬레스키가 피렌체 대성당 앞에 있는 산 조반니 세례당의 청동문 부조 공모전에서 떨어졌다는 사실입니다. 그런 일이 있고 나서 바로 로마로 향했으니, 도나텔로처럼 대부분이 브루넬레스키가 고대 로마의 조각 기술을 더 배우러 갔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를 모르는 추측들입니다.


브루넬레스키는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좋은 기초 교육을 받고 성장했습니다. 정부 관리였던 아버지로부터 공화정과 시민 정신을 배웠고, 정통 귀족이자 은행 가문 출신 어머니의 영향으로 중상주의와 실용주의를 익혔습니다. 따라서 그는 셈법, 수학, 기하학 등 실용 학문에 관심이 많았고, 라틴문학에서 단테의 작품까지 인문주의 서적 읽기를 좋아했습니다. 그는 고전을 배우기 위해서 이미 10대에 로마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하지만 브루넬레스키가 가장 관심을 가지고 집중했던 것은 금세공 분야였습니다. 이는 당시 실용주의를 중시하는 사회적 분위기와 그러한 실용주의자를 육성한 메디치 가문의 영향이 컸습니다. 따라서 브루넬레스키는 시민 정신과 인문주의에 바탕을 두고, 학문보다는 현장 중심으로 이론과 실습을 배워나갔습니다. 그래서 현장에 필요한 기계를 직접 제작하기도 했는데, 지금으로 치면 스마트워치에 해당하는 기계식 알람 시계도 발명했습니다.



그러던 중 1401년 피렌체 대성당 산 조반니 세례당의 두 번째 청동문 설치를 위한 공모전 공고가 났습니다. 주제는 창세기 22장의 ‘아브라함이 이사악을 제물로 바치는 장면’을 정해진 규격에 청동으로 표현하는 것이었습니다. 금세공에 자신 있었던 브루넬레스키는 그의 실력을 뽐낸 멋진 작품을 제출했습니다. 그런데 심사를 맡은 34인 위원회는 그와 로렌초 기베르티(Lorenzo Ghiberti·1378-1455)를 공동 당선자로 발표했습니다. 출품작에서 드러나듯, 작품 성향이 너무 다른 기베르티와는 공동으로 작업할 수 없음을 알았던 브루넬레스키는 이 결과를 수용하지 않고 단독 당선을 요구했는데, 그것이 거부되자 더 이상 금세공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피렌체를 떠난 것입니다.


그러니 로마에서 브루넬레스키가 몰두했던 것은 도나텔로가 상상하는 고대 로마의 청동 조각상 연구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건축에 관심을 두고 로마에서 고대 건축물들을 찾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건물의 높이와 폭, 길이를 측량하여 그들 사이의 비례관계와 지붕의 경사도 등을 연구했습니다. 그는 그렇게 얻은 로마 건축물의 정보를 양피지 위에 기록해 두었는데, 혹시 모를 유출에 대비하여 비밀 기호와 아라비아 문자로 치수를 기록했다고 합니다. 한 세기 후 레오나르도 다 빈치도 그랬다는데, 천재들의 애환이겠지요?




특히 그가 로마에 머무는 이유는 판테온 때문이었습니다. 1500백 년 동안 굳건히 서 있는 판테온의 돔을 보는 순간, 그는 고향 땅에 돔 지붕을 덮지 못한 채로 수십 년이 흐른 대성당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 육중한 콘크리트 돔은 어떻게 아래로 무너지지 않을까? 이 돔의 엄청난 하중을 받는 외벽은 어떻게 밀리지 않고 버티고 서 있을까? 그런 끊이지 않는 의문들 속에 브루넬레스키는 수도 없이 돔을 오르내리며 그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서 연구를 이어갔고, 결국 몇몇 실마리를 잡게 되었습니다.


고대인들은 우선 돔의 하중을 가볍게 한 것입니다. 돔 하부의 두께는 약 6미터인데 오쿨루스(원형 개구부) 두께는 1.5미터에 불과합니다. 상부로 갈수록 돔의 두께가 얇아진 것입니다. 또한 돔의 재료도 상부로 갈수록 가벼운 것을 사용했는데, 하부는 콘크리트와 벽돌의 혼합을, 중간은 콘크리트와 응회암의 혼합을, 그리고 상부는 콘크리트와 화산암의 혼합을 사용했던 것입니다. 거기에 돔의 안쪽 면을 격자 형태의 요철 구조체로 구성하여 돔의 무게를 줄이면서도 구조적으로 견고하게 만들었습니다.


이 밖에도 브루넬레스키는 판테온의 높이와 너비, 돔의 지름이 보여주는 수치 사이의 비례 등 판테온의 퍼즐을 맞추기 위해서 10여 년 동안 로마를 여러 차례 오갔습니다. 그렇게 고대 로마의 건축 기술을 습득한 브루넬레스키는 1417년 피렌체로 완전히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아무도 흉내 내지 못할 일을 벌이고 맙니다. 멋지게!



글 _ 강한수 가롤로 신부(의정부교구 건축신학연구소 소장)


이형준 기자 june@catimes.kr



[기사원문보기]
가톨릭신문 2025-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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