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인의 가장 큰 취약점은 아마도 남의 말을 듣는 것이 아닐까 한다. 자기주장과 개성이 강해 대부분 자기표현이나 말은 잘하지만, 남의 말을 듣는 데는 익숙하지 않다. 사실 자기 말을 하기보다 남의 말을 듣기가 훨씬 더 어렵다는 것을 우리는 늘 경험한다. 이는 시대를 초월하여 모든 인간의 공통된 경험이란 생각이 든다. 인류의 시조 아담도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아 결국 낙원에서 쫓겨나지 않았던가! 오늘은 사막 교부들이 우리에게 주는 ‘들어라!’는 권고에 귀를 기울여 보자.
“압바 요셉이 압바 니스테루스에게 물었다. ‘제 혀를 통제할 수 없으니, 제가 어찌해야 하겠습니까?’ 원로가 말했다. ‘말을 할 때 평화롭습니까?’ 그가 ‘아니요’라고 대답했다. 원로가 말했다. ‘평화롭지 못하다면 어째서 말을 하는 것입니까? 입을 다무십시오. 그리고 대화가 있을 경우, 말하기보다는 경청하는 것이 더 낫습니다.’”(니스테루스 3)
이 금언은 경청의 지혜를 강조하고 있다. 말이 우리에게 평화를 보장해 주지 않기 때문이다. 과도하고 공허한 말은 오히려 내적 고요와 평화를 앗아간다. 우리는 너무도 말이 난무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듣지 못하는 곳에는 결코 평화가 있을 수 없고, 대화와 타협, 화해와 일치를 기대할 수도 없다. 그래서 우리 사회는 여전히 갈등과 대립, 불목과 분열의 늪을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지금 우리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듣는 것’이다. 왜 그럴까?
들음, 대화의 전제
들음은 대화의 전제다. 대화를 통해 우리는 각자의 생각과 의견을 나누며 서로에 대해 알아가게 된다. 그러기 위해선 먼저 상대의 말을 듣는 자세가 필요하다. 듣지 않고 자기 말만 하면 대화가 되지 않는다. 참된 대화는 말을 ‘주고받는 것’이 아니라 ‘받고 주는 것’이다. 상대의 말을 듣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 자기 말을 주는 데, 즉 자기 생각과 의견 혹은 주장을 관철하는데 강조점을 두다 보면 대화는 늘 공전한다. 하느님과의 대화인 기도도 마찬가지다. 먼저 하느님 말씀을 듣기보다도 끊임없이 자기 말만 일방적으로 되풀이하다 보면, 참된 기도가 되지 않는다. 그래서 듣는 것이 중요하며 선행되어야 한다.
듣는 것이 중요하지만 듣더라도 잘 들어야 한다. 잘못 들으면 그릇된 응답이 나올 수 있다. 각자 자기식으로, 자기가 원하는 것만 듣기에 늘 동문서답이다. 잘 듣기 위해 전제되는 것이 바로 침묵과 열린 마음이다. 이 둘은 함께 가야 한다. 아무리 침묵하고 있어도 마음을 닫아걸고 있으면 제대로 들을 수가 없다. 닫힌 마음을 지배하는 고정관념과 편견, 선입견이 우리로 하여금 제대로 듣지 못하고 건성으로 듣게 하기 때문이다.
상대의 말을 건성으로 듣는 것은 참된 들음이 아니다. 들음은 경청이 되어야 한다. 경청은 한자어로 두 가지 의미를 담고 있다. 즉 ‘귀 기울여 들음’(傾聽)과 ‘공경하는 마음으로 들음’(敬聽)이다. 따라서 참된 들음은 상대를 공경하는 마음으로 그의 말에 귀를 기울여 듣는 것이다. 이런 경청이야말로 참된 대화를 가능하게 하고 갈등과 대립, 불목과 분열에서 벗어나 평화의 길을 열어줄 것이다.
들음, 순종의 시작
들음은 순종과 직결된다. 순종이 우리 구원 여정에서 중요한 이유는 침묵에 관한 지난 회에서 이미 언급한 바 있다. ‘듣다’(audire)라는 라틴어 동사에서 유래한 ‘순종’(oboedientia)은 간단히 말해 ‘말을 듣는 것’이다. ‘부모님께 순종하라’는 말은 곧 ‘부모님 말씀 잘 들어라’는 것과 같다. 이처럼 순종은 들음으로 시작된다. 하지만 단순히 듣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들은 것을 실행할 때 완성된다. 순종은 ‘들음’과 ‘응답’으로 되어 있다. 말씀을 듣고 그것을 실천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느님께 순종함으로써 다시 그분께 되돌아간다. 이는 곧 하느님 말씀을 경청하고 그 말씀에 따라 사는 것이다. 하느님 말씀의 핵심에는 바로 사랑이 있다. 따라서 순종의 길은 곧 사랑의 길이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순종의 모범을 보여주셨다. 그분이 가신 길은 아버지께 대한 철저한 순종의 길이었고, 그것은 하느님과 우리에 대한 사랑 때문에 가능했던 길이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인 우리는 그분이 가신 이 순종의 길, 즉 사랑의 길을 통해서 하느님께 되돌아가게 될 것이다.
들음, 제자의 표지
사막에서 ‘들음’은 주로 제자에게 강조된다. 제자는 스승의 말을 듣고 실천하는 자였고, 스승은 제자를 가르치고 명령하는 자였다. 제자는 스승이 하는 모든 말에 무조건 순종해야 했다. 스승에게 순종하는 것은 곧 하느님께 순종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순종함으로써 제자는 마음이 깨끗해지고 자신의 격정을 길들이게 되어 마침내 내적 평화를 얻게 된다.
수도승은 ‘듣는 자’다. 이는 가르치기보다 배우는 제자임을 뜻한다. 그의 참된 스승은 바로 그리스도이시다. 우리 그리스도인 역시 그리스도의 제자다. 그래서 늘 듣는 자로 남아 있어야 한다. 그리고 들은 바를 실천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제자는 늘 하느님 말씀을 경청하고 그 말씀 안에 담긴 그분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며, 동시에 세상과 사람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응답하려 노력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늘 배우는 사람이다.
나이가 들수록 축적된 자신의 경험으로 말이 많아질 수 있다. 또 남을 가르치려는 유혹을 더 강하게 받을 수 있다. ‘나이가 들면 입을 닫고 지갑을 열라’는 말이 있다. 사실 말이 많아지면 추해질 수 있다. ‘나 때는~’이나 ‘꼰대’ 취급받지 않으려면 말을 줄이고 자신의 경험에서 얻은 지혜를 행동으로, 삶으로 보여주어야 한다. 말 많은 우리 시대에 진정 필요한 것은 말이 아니라 들음(경청)일 것이다. 들음은 제자의 표지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참 제자이기를 바란다면 ‘말하는 자’가 아니라 ‘듣는 자’가 되려고 노력할 필요가 있다.
글 _ 허성석 로무알도 신부(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수련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