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3월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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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시록으로 읽는 믿음과 삶] 티아티라에 보내진 편지(묵시 2,1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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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아티라는 여러 산업이 발달한 곳이었다. 빵, 염색, 가죽 공예 등의 산업으로 꽃을 피운 곳이었다. 각각의 산업 분야마다 상인 조합들이 형성되었고, 장사를 할라치면 그 조합에 가입해야 했다. 예나 지금이나 물건을 사고파는 경제적 공동체는 그 공동체가 자리 잡은 곳의 문화적, 종교적 관습을 담아내기 마련이다. 티아티라 역시 마찬가지였다. 다양한 이방 문화와 종교에 가담할 수 밖에 없었던, 혼합종교의 삶을 살아간 곳이 티아티라였다.


티아티라에 편지를 보내는 이는 “하느님의 아들”(묵시 2,18)로 소개된다. 요한묵시록에서 유일하게 사용된 ‘하느님의 아들’이란 호칭은 28절 ‘아버지’라는 표현과 맥을 같이 한다. 하느님을 아버지로, 그분이 간택한 이를 아들로 엮어내는 것은 다분히 구약의 메시아 사상을 함축하고 있다.(시편 2,8-9) “불꽃 같은 눈과 놋쇠 같은 발을 가진 이”(묵시 2,18)로서 하느님의 아들은 어느 누구도 대적 못 할 강한 힘을 지닌 듯 하다. 그 힘의 뒤편엔 그 어디에도 눈을 돌리지 말고 하느님을 바라보라는, 그리하여 하느님의 아들이 분명히, 강력히 말하는 것은 하느님의 말씀이라서 무거운 책임감을 느껴야 한다는 무언의 압박도 존재한다.



티아티라는 사랑, 믿음, 봉사에 투철했다. 그럼에도 이제벨이라는 여자를 용인하는 것이 티아티라에 보내는 편지의 문제 제기다. 이제벨은 아합왕의 아내였고 바알신을 섬기도록 부추긴 여자였다.(1열왕 16,31) 하느님을 버리고 바알을 좇는 일은 예후에 의해 ‘불륜’으로 비난받기도 했다.(2열왕 9,22) 이제벨은 과거의 여자였으나 현재 티아티라의 상황을 비판하기 위한 하나의 은유 장치로 이해할 수 있다. 이제벨은 “예언자로 자처”(묵시 2,20)한다고 서술한다. ‘예언자’라는 말마디를 통해 학자들은 티아티라에서 몬타니즘이 성행했던 사실에 주목한다. 2세기부터 시작된 몬타니즘은 성령을 통한 환시와 황홀경을 중시하고 극단적 엄격주의를 통해 선민주의적인 행태를 보인 이단의 한 형태다. 몬타니즘은 특별히 여성 예언자, 예컨대 프리쉴라, 막시밀라, 암니아와 같은 여 예언자를 통해 활성화되었는데, ‘과거의 여성’ 이제벨을 소개하는 티아티라의 편지는 이러한 몬타니즘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고 학자들은 추정한다.


이제벨로 대변되는 신앙의 일탈은 무엇이었을까. 몬타니즘을 배경으로 추정해보면 이렇다. 이제벨과 그를 따르는 무리는 특별한 영적 체험에 대한 과도한 맹신에 집착했을 것이다. 저만이 특별한 계시에 초대받았다는 증거가 환시나 황홀경의 체험으로 특정되었고 그 체험이 더욱 견고해지면서 다른 이들에 대한 비교우위의 배타적 신심에 포로가 되었을 것이다. 초대교회의 관심사 중 단연 제일은 예수님의 재림이었을 테고, 그 재림이 무엇이고 누가 그 재림에 합당한 것인지는 도무지 알 수 없어서 두려운 질문으로 남아 있었을 테다. 이제벨과 그를 따르는 이들은 두려운 질문을 자신들의 체험 안에서 명확한 정답으로 읽어내고 싶었을 것이고, 자신들의 영적 체험과 신앙적 신념을 절대화하기에 이르렀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오시는 것보다 자신의 체험과 신념이 더 중요해진 신앙을 우리 성경은 ‘불륜’이라 부르고 있다. 그리고 불륜의 끝은 ‘죽음’이라고 티아티라에 보내진 편지는 분명히 한다.(묵시 2,23)


신앙의 일탈은 나쁜 짓, 악한 짓을 저지를 때만 드러나는 게 아니다. 자신의 생각과 신념과 행동방식을 객관화하지 못하는 데서 신앙의 일탈은 훨씬 심각한 것이 된다. 저만이 하느님의 신비를 제대로 꿰차고 있다는 착각 속에 다른 이들의 신앙 감각과 체험에 대해 무시하거나 외면하는 완고함과 거만함이 신앙을 왜곡한다. 이제 신앙은 저만의 이데올로기가 되어 그 누구의 말도, 조언도, 비판도 쓸모없는 것이 된다. 철저히 고립된 자신이 세상의 박해 속에 살아가는 진정한 신앙인인 양 고뇌하며 살아간다. 자기 스스로를 절대화하는 곳에 하느님은 허상으로 존재할 뿐이다. 불꽃 같은 눈과 놋쇠 같은 발을 지닌 하느님의 아들은 손가락 사이 무심히 흘러내리는 모래 한줌처럼 힘없이 사라질 뿐이다. 그 허상을 하느님이라 믿어 고백하는 일, 참 허망한 일이 된다.


그리하여 하느님의 아들은 티아티라에게 다른 짐은 지우지 않겠다고 하신다.(묵시 2,24) 다만 끝까지 지켜야 하는 일 하나를 제시하신다. 이제벨과 그 추종자들이 말하는 ‘사탄의 깊은 비밀’을 알려고 하지 않는 이들에게 제시하신다. ‘깊은 비밀’이란 표현에 영지주의적 색채가 짙게 배어있다. 영지주의는 더 많은 지식과 앎을 통해 누구보다 더 깊이 참된 진리를 얻어내려는 경쟁적 사상을 내포한다. 우리의 편지는 이러한 태도를 ‘사탄의’라는 수식어로 규정해 버린다. 하느님의 깊은 진리는 인격적 관계에 따른 타자에 대한 배려와 환대를 기본으로 한다. 저만의 노력이나 열정으로 타자를, 나아가 하느님을 알아내겠(었)다고 덤벼드는 일은 사탄의 일이다.


티아티라에게 남겨진 하나의 일은 어쩌면 하느님이 누구이신가 라는 질문 그 자체가 아닐까. 사탄의 깊은 비밀이 아니라 진정으로 하느님의 깊은 신비는 어떤 것인가라는 질문 말이다.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말한다. “오! 하느님의 풍요와 지혜와 지식은 정녕 깊습니다. 그분의 판단은 얼마나 헤아리기 어렵고 그분의 길은 얼마나 알아내기 어렵습니까?”(로마 11,33) 하느님의 깊은 신비는 여전히 두려운 질문으로 남아 있어야 한다.(에페 3,18) 하느님을 안다고 하는 순간, 그 모든 신앙은 실패한다. 민족들을 다스리는 권한과 샛별을 받는 일은 다름 아닌 예수님과 하나가 되는 일이다.(묵시 2,26-27; 22,16) 예수님과 하나 되는 일은 끊임없는 타자에 대한 질문으로 가능한 것이지, 자신이 정답이라 생각하는 순간, 질문은 강요가 되어 타자를 죽이고 하느님을 업신여기게 된다. 하느님 앞에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조용히, 겸허히 다시 한번 묻게 된다. “당신은 누구이신지요?”



글 _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대구대교구 문화홍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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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25-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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