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4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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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난 가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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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까지 나와 지인들이 가끔 나누던 화제는 앞으로 곧 있다는 후지산 폭발과 난카이 대지진에 대한 것이었다. 동일본 쓰나미야 일본 열도가 가로막혀 있고, 또 거리도 상당하다고 하지만 난카이 해구는 부산 앞바다에서도 그리 멀지 않은 곳이니 염려스러웠다. 한번은 가족 모임에서 이 이야기가 나왔는데, 이공계 학위를 가지고 있으며 평생을 과학 도시에서 살고 있는 오빠가 “그거 7월 5일쯤 난다고 하니 그 무렵엔 절대 일본에 가면 안 될 거야” 하기에 마음속으로 그 날짜를 새겨두고 다른 여러 이야기를 하다가 “오빠 그거 지질 연구소나 해양 연구소 친구분들이 측정한 거야?”라고 묻자, 오빠가 태연하게 “아니 일본 예언가가 그랬다는데 유튜브에 나와” 하는 것이었다. 순간 입에 물고 있던 음식을 뿜을 뻔했던 건 비밀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40년 내로 그 일이 일어난다는 것만이 확실했고, 그 날짜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도 나는 ‘산 중턱에 살고 있으니 좀 낫겠지’ 했는데 그만 얼마 전 지리산 너머에서 산불이 나고 말았다. 지리산 북쪽에서 시작된 산불이 내가 글을 쓰는 순간에도 꺼지지 않았다고 한다. 지리산국립공원과 그 권역이 서울시의 1.5배 정도로 넓기에 큰 걱정은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일주일째 불이 지속되자 남의 일 같지 않았고 바람이 불면 가슴이 후르르 쓸려나가곤 했다. 두려움도 있었고 근심도 있었다. 다시 또 생각하는 일이지만, 은총이 아니라면 한순간이라도 우리에게 안전한 곳이 있을까 싶다.


이번에 불이 난 곳은 드론을 타고 우리 집에서 하늘을 올라가면 몇십 분이면 닿을 수 있는 곳이기에 나도 크게 안심하고만은 있을 수가 없긴 했다. 전화기에서는 계속해서 경보가 울리고 집 뒤 봉우리로 헬기들이 쉴 새 없이 날아가고 있었다. ‘만일 우리 동네에도 경보가 울리면 나는 무엇을 가져갈까’ 싶어 소위 재난 가방을 챙기려고 작은 여행 가방을 꺼냈다. 우선 지갑 여권 그리고 노트북 …. 그러고 나자 더 넣을 게 없었다. 3일 여행에도 뚱뚱한 가방을 싸던 나였는데 그냥 여행을 가는 게 아니라 집이 불탄다고 가정을 하니, 하나도 넣을 게 없었다. 고심 끝에 겨우 하나 더 추가한 것이 보조 배터리와 커피 텀블러였다. 피식거리며 웃음이 나왔다. 재난경보를 받고 챙겨야 할 것이 이거라면 이 지상을 떠나라는 명령을 받을 때 나는 무엇을 챙길까.


오래전부터 나는 죽음을 연습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어떤 성인의 말씀대로 ‘새의 발목을 쇠사슬로 묶어놓든 명주실로 묶어놓든 날지 못하기는 마찬가지다’라는 것을 새기며 이 지상을 떠날 때 혹여라도 미련을 둘 것을 하나씩 정리해 왔다. 그리고 요즘 들어 얼마간은 정리했다고도 생각했다. 아빌라의 성 데레사의 말처럼 ‘삶을 낯선 여인숙의 하룻밤’까지 여기지는 못했어도, ‘누군가 공짜로 주신 좋은 리조트에서의 여러 날’이라고 생각해 왔다. 처음 도착할 때부터 “내가 부르면 너는 와야 한다”라는 조건으로 살게 된 이곳. 그러니 부르시면 손에 쥐었던 모든 것을 놓고 기쁘게 “네!”하고 대답하고 싶은 것이 내 소망이다.


사람들은 묻는다. “너무 비관적인 거 아냐. 뭐 그런 생각을 해.” 나는 앞날에 대해 그리 세세하게 근심하는 스타일의 사람은 아니다. ‘내일 일은 내일 걱정하자’는 철학을 학창 시절부터 지켜왔다. 숙제도 결국 못한 적이 많았고 시험은 초치기가 거의 다였다. 그러나 죽음에 대해서만은 그렇지 않았다. 그리고 그 죽음에 대한 의식은 나의 삶을 더 경쾌하고 가벼우며 의미 있고 감사로 가득 차게 만들어준다. 생각해 보라. 언제 떠날지 모르는 리조트에 도착했는데 그곳이 아름답다면 당신은 커튼을 치고 낮잠을 자겠는지 아니면 그곳을 돌아보며 감사하겠는지.


하느님 부르시면 텀블러도 여권도 소용없겠지. 다만 그게 지금이라면, 그래서 죽기 전에 소망이 하나 있다면 국회의원들 세비 뺏어다 우리 고생하시는 소방관들에게 다 드리고 싶다.



글 _ 공지영 마리아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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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25-0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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