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4월 3일
사목/복음/말씀
전체기사 지난 연재 기사
불안의 시대 넘어서는 길은 연결하고 연대하는 ‘희망’

[김용은 수녀의 오늘도, 안녕하세요?] 107. 불안의 시대

폰트 작게 폰트 크게 인쇄 공유

우리는 불안과 불확실성 시대에도 희망을 품고 이웃과 함께 걸어나가야 한다. 학생들이 함께 연을 날리고 있다. OSV

“‘나쁜’의 우리말 어원은 ‘나뿐’이고, ‘좋은’의 우리말 어원은 ‘주는’이다. 나쁜 사람은 나뿐인 사람이고, 좋은 사람은 나누어주는 사람이다.”(박노해)

시인은 ‘나쁜’이 ‘나만 생각하는’에서 온 말이라고 한다. 반면 ‘좋은’은 ‘주는’에서 유래했다고 본다. 물론 ‘나쁘다’가 ‘낮다’에서 왔다는 또 다른 설도 있다. ‘낮다’의 ‘낮’에 접미사 ‘-브다’가 결합해 ‘낫브다’가 되었고, 이것이 변형되어 ‘나쁘다’가 되었다는 것이다. 질이 낮고 부족한 상태의 ‘낮다’의 의미도 ‘나뿐’과 크게 다르지 않다.

사실 ‘나뿐’인 세상에서는 타인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고, 서로를 경쟁자로 여길 뿐이다. 결과적으로 고립감은 커지고, 공감과 연대를 바탕으로 한 공동선은 희미해진다. 이런 이기적인 사회는 결국 우리 모두를 불안하게 만든다.

우리는 지금 ‘불안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불안은 미세먼지처럼 공기 중에 떠다니며 우리의 시야를 흐리게 한다. 매일 쏟아지는 과잉 정보는 생존을 위협할 정도로 불안을 부추긴다. 양극화와 생존경쟁, 기후위기로 인한 재앙, 정치적 대립, 경제적 불안은 사람들을 자기보호에 몰두하게 만든다. 성공이 생존의 조건이 되고, 욕망이 희망에 올라타면서 불안은 더욱 커진다.

경제·직업·기후·정치 등 모든 것이 불확실하다. 우리에게 언제 어떤 일이 닥칠지 모른다는 두려움은 불안을 더욱 가중시킬 수밖에 없다. 불확실성이 클수록 불안감은 증폭되고, 우리는 그것에 더욱 예민해진다. 생존의 위협을 느끼게 되면서 마치 맹수 앞에 서 있는 것처럼 뇌의 편도체는 비상 신호를 보낸다. ‘이성’은 멈춘 채, 뇌는 단지 ‘도망갈 것’인지 아니면 ‘맞서 싸울 것’인지에만 에너지를 쏟는다. 통제력을 상실한 무력감은 회피하거나 침묵하게 하고, 반면에 폭력적으로 폭발하거나 극단적 신념으로 무장하여 공격하기도 한다.

이때 불안은 소속감을 강화하기 위해 ‘우리’를 ‘아군’으로, 반대편을 ‘적’으로 규정한다. 단순하고 확고한 해답을 원하면서 극단적 신념에 빠져든다. 그렇게 해야 불안감을 해소하는 심리적 메커니즘이 작동되기 때문이다. 자신이 속한 집단의 우월감을 내세우기 위해 ‘우리’의 행위를 정당화하고 ‘저들’의 행위는 그르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렇게 형성된 집단 정체성은 우리를 보호해줄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불안을 더욱 증폭시킬 뿐이다.

이러한 불안과 대립의 구조는 이념·지역·세대·계층적 갈등과 충돌로 이어진다. 흑과 백으로 선을 긋고 경계를 만든다. 경계가 확실할수록 자기보호가 쉬워지고, 표적도 뚜렷해지기 때문이다. ‘우리’의 안정감을 위해 ‘저들’은 적이어야 한다. 내가 지지하는 정당이 권력을 잃는 것은 마치 내가 속한 집단의 소멸을 의미한다. 외부의 위협은 집단 결속력을 강하게 하고, 신념은 더욱 굳어져 종교적 신념처럼 확고해진다. 그렇다고 해서 정말 우리는 안전해질까? 집단에 속해 적을 규정하고 경계를 강화하면 불안이 해소될까? 오히려 불안은 더 커지고, 불신과 적대감만 깊어진다.

박노해 시인은 ‘나쁜’은 ‘나뿐’이고 ‘좋은’은 ‘주는’ 사람이라고 했다. 결국 ‘나뿐’인 불안사회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나눔’과 ‘연대’의 삶을 살아야 하지 않을까. 타인을 배척하면서 ‘적’으로 규정하면 우리 진영은 결속력을 다지지만, 결국 경쟁의 구도에서는 불안감만 증폭될 뿐이다. ‘나뿐’에서 너에게 ‘주는’ 사회로 넘어가 타인과 연대하고 공감할 때 우리는 진정한 안정감을 얻을 수 있다. 신뢰를 회복하고, 나누고, 연대하는 작은 행동이야말로 불안의 미세먼지를 거둬낼 수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희망은 공동체 안에서 실현된다고 한다. 소외된 사람들과 함께하는 공동체적 실천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불안 시대의 불안은 개인의 문제를 넘어 사회 전체의 문제다. 불안에 맞서 싸우기보다 불안을 함께 나누면서 희망을 살아내야 한다. 희망은 그저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살아내야만 한다. 희망은 바라고 낙관하는 것이 아닌, 직접 찾아 나서 움직이면서 ‘타인과 함께 나누는 사랑’이다. 우리가 불안의 시대를 넘어설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연결하고 연대하는 ‘희망’이다.



<영성이 묻는 안부>

우리에겐 여러 가지 불확실성이 존재합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이러한 불확실성이 우리가 원한다고 해서 금방 사라지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기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면서 우리 앞에 놓인 불확실성을 받아들여야 할 것 같습니다. 분노하고 미워하면서 험담을 쏟아내는 행동은 오히려 불안을 증폭시킬 뿐이니까요.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걱정을 내려놓고, 지금 이 순간에 감사하며 희망을 품는 순례자가 되었으면 합니다. 순례자는 관광객과 달리 목적지에 도달하는 것에 마음을 쓰기보다 지금 이 순간에 깊이 머뭅니다. 현재만이 나에게 주어진 소중한 시간이니까요. 희망의 순례자는 단순히 자기 자리에 앉아 낙관하며 바라는 사람은 아닙니다. 자기 자신에게만 집중하고 자기 행복만 바라며 긍정하는 사람도 아닙니다. 희망의 순례자는 타인에게 옮겨가며 연결하고 화해하며 나눔을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어두울수록 불안할수록 우리의 희망은 더욱 빛나고 강합니다. 우린 그것을 믿습니다.
 


 



[기사원문보기]
가톨릭평화신문 2025-04-02

관련뉴스

말씀사탕2025. 4. 3

마태 5장 46절
사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그것은 세리들도 하지 않느냐?
  • QUICK MENU

  • 성경
  • 기도문
  • 소리주보

  • 카톨릭성가
  • 카톨릭대사전
  • 성무일도

  • 성경쓰기
  • 7성사
  • 가톨릭성인


GoodNews Copyright ⓒ 1998
천주교 서울대교구 · 가톨릭굿뉴스.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