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주간이 시작되는 주님 수난 성지 주일입니다. 주님 수난 성지 주일에는 예수님께서 파스카 신비를 완성하시려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을 기념하는 성지 축성 예절 복음과, 주님의 만찬과 수난받으심 돌아가심 묻히심을 전하는 수난 미사 복음이라는 상반된 내용의 두 복음을 듣습니다.
첫 번째 복음에서 군중들은 나뭇가지를 들고 예수님을 환영했고 어떤 이는 겉옷을 벗어 예수님께서 가시는 길에 깔기도 하였습니다. 군중들이 예수님을 환영한 이유는 예수님이야말로 임금 중의 임금이시고 구세주시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두 번째 복음에서 군중들의 환호는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라고 외치는 단죄의 소리로 바뀝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에 대한 찬미는 모욕과 저주로 바뀝니다. 믿음과 불신, 환호와 배신, 기쁨과 슬픔의 서로 다른 두 감정과 배반의 쓰라린 현장을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왜 군중들 마음이 돌변했을까요? 그것은 군중들의 생각과 예수님 뜻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군중들의 마음에 들지 않는 메시아였기 때문입니다.
군중들은 빵의 기적을 보았고 소경이 눈을 뜨고 절름발이가 걷는 징표를 체험했습니다. 그들은 선택된 민족으로서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을 로마에서 해방시키시고 세상을 지배하는 정치적 꿈을 이뤄주실 메시아로 생각해 왕으로 모시려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인류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당신을 내어주시는 ‘고통받는 하느님의 종’의 모습이셨습니다.
보잘 것 없는 제자들을 뽑아 데리고 다니시고, 세리와 죄인과 병자들과 어울리시고, 율법도 모르는 무식한 죄인들이 먼저 천국에 들어가리라고 가르치시고, 부녀자와 어린이들과 가까이하시고, 이방인들을 반기시고, 성전을 허물면 사흘 안에 다시 짓겠다고 하시는 예수님 모습이 그들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입니다. 군중들의 바람은 고통없는 승리이고, 희생없는 영광이었기에 예수님의 이러한 모습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시대 군중들의 모습은 오늘날 우리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에게 유익할 것 같으면 환호하며 따르다가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여기면 마음을 바꾸는 모습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가정의 평안함과 소원 성취와 즐거움을 기원하며 그렇게 해주시는 주님을 바라는 마음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지금은 바빠서 안 되고, 작은 시련과 고통에도 견디기 힘들다 하며 주님을 떠나려는 속성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이웃과 친척들과 불목하고 자신의 생각만 고집하며 안 좋은 말을 전하려는 성향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십자가와 희생을 외면하고 편리를 추구하는 나태함이 있습니다. 예루살렘 입성 때 환호하다가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쳤던 군중의 양면성은 오늘날 우리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오늘 수난 복음 후반부에서는 희망도 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찬양하며 고백한 백인대장, 가슴을 치며 돌아간 군중, 예수님의 친지들과 갈릴래아에서부터 따라온 여인들, 아리마태아 출신 요셉 등 신앙을 지키고자 했던 이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교회를 지켰고 그 수는 점점 많아졌습니다.
오늘날에도 묵묵히 하느님을 사랑하고 교회를 위하는 선한 이들이 많습니다. 그들로 인해 세상과 교회는 굳건히 유지됩니다. 한결같이 신앙을 지켜나가는 선한 이들은 하느님 은총 안에 살아갑니다. 매일 미사 참례하고, 조용히 기도 바치고, 드러나지 않게 희생과 선행을 드리는 이들은 세상과 교회에서 참으로 소중한 보물과 같습니다. 그 한결같은 선한 사람 중에 바로 당신이 있기를 기원합니다.
이계철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