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루살렘 양 문 근처에 벳자타라는 연못이 있었다. 그곳에는 천사가 물을 출렁거릴 때 제일 먼저 그 못에 들어가는 사람의 병이 나으리라는 전설이 있었다. 가짜뉴스였다. 그걸 믿고 거기에서 38년을 누운 채로 기다리는 병자가 있다. 어느 날 예수가 그에게 다가가 묻는다. “건강해지고 싶으냐?” 하신 거다. 좀 너무하신 것 아닌가? 빤히 보면서 누굴 놀리느냐고 뺨을 맞으신데도 편들어 드리진 못할 것만 같은데 병자의 대답은 한술 더 엉뚱하다. “저를 못 속에 넣어줄 사람이 없습니다. 다른 사람이 먼저 들어가 버리니까요.” 그러자 예수는 말한다. “일어나 네 침상을 들고 걸어가라.” 그는 그 자리에서 나아 버렸다. 병이 나았으니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이 두 사람의 대화는 선문답처럼 기이했을지도 모른다.
이 장면이 내게 준 충격은 어마어마했다. 뻔히 아픈 걸 보시면서 “낫고 싶으냐”고 묻는 예수님도, 그런 질문에 ‘제가 처방을 안다’는 듯 대답하는 병자도 그랬고 더더욱. 그런데도 병이 나아 버리는 것도 그랬다.
돌아보면 여러 번 예수께서 내게 물으셨다. “구원받고 싶으냐? 평화로워지고 싶으냐? 혹은 진리를 알아 자유로워지고 싶으냐?”라는 질문이었던 것 같다. 그때마다 나는 대답했었다. “우리 남편이 정신을 차려야 할 것 같아요. 우리 아이들이 철이 들어야 할 것 같아요. 돈이 조금만 더 있어야 해요. 저 정치인은 없어져야 할 것 같아요.” “건강해지고 싶으냐” 물었을 때, 그냥 “예 그렇습니다” 하는 대답은 내게도 38년이 지나서 60년이 되도록 그렇게나 어렵다.
내 인생을 돌아보면 20대에 세상의 이치를 다 안다고 생각했었고, 30대에 세상은 알겠으나 사람은 모르겠다고 문득 깨달았다. 40대가 되자 내가 모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으며, 50대가 다 지나가자 내가 그동안 아무것도 모른 채로 떠들었던 것이 부끄러워 견딜 수가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그리고 한가지 확실히 알게 되었는데, ‘내가 다는 모른다’는 것이다. 다만 나는 내가 평화롭고 우리 인류가 평화롭고 우리 민족이 평화롭기를 진심으로 원한다는 것을 알 뿐이다. 왜 정치적 발언을 하지 않는가에 대한 대답은 아마도 이것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아마도 예수께서 “이 나라의 평화가 오기를 원하느냐” 물으시면 “저기요 저 정당은 좀 정신을 차려야 할 것 같고, 저 정당은 곧 독재할 것 같고, 미국은 좀 자제를 해야 할 것 같고”하는 말을 꾹 참고, “예수님 우리에게 평화를 주십시오”라고 할 수는 있게 된 것 같다.
다만 작금의 현실을 돌아보며, 법정에서 한 아기를 놓고 ‘반 갈라 가지라’고 한 솔로몬의 판결을 듣고, 한 엄마는 ‘칼로 세로로 깨끗하게 자르자’고 하고, 한 엄마는 ‘가로로 잘라 나누자’고 하며 싸우는 모습을 보는 것만 같다. “어떻게 아기의 몸을 세로로 반을 자르자고 할 수 있나요? 저는 반대입니다”라고 말하니, “그럼 넌 가로로 자르자는 편이구나?” 하고 몰아세우고, “어떻게 아이를 가로로 잘라요?” 하고 물으니 “그런 너는 세로로 자르자는 편이구나” 하며 몰이들을 해댄다. 사제들까지도 거기에 합세하고 있다.
좀 쉬러 성당에 가도 “너 세로 파야 가로 파야?” 이러는 강요를 듣는 것만 같아 정말 힘이 든다. 진짜 엄마는 법정에 들어오지도 못한 채 문밖에서 울고 있는데, 이 나라는 어디로 갈까. 주님 제게 물어주십시오. 꾹 참고 대답할게요. “예, 이 나라의 평화를 원합니다.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소서” 하고.
글 _ 공지영 마리아(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