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늘 무언가를 해야만 하고, 성과를 내야만 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 지하철역에서 사람들이 바삐 어디론가 향하고 있다. 뉴시스
서로 사랑했다고 믿었다. 여느 부부처럼 때로는 다투고 갈등도 있었지만, 그래도 신뢰하며 함께 살아왔다고 믿었다. 하지만 그의 남편은 다른 여자에게 떠나고 말았다. 그는 배신감에 치를 떨며 물어왔다. “이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은 있기나 한 거냐”고. 그의 격한 음성에서는 버림받았다는 모욕감, 미움과 원망, 그리고 힘겨웠던 지난날의 억울함까지 고스란히 묻어났다.
한참의 시간이 흐른 어느 날, 뜻밖에도 그는 밝은 얼굴로 찾아왔다. 그동안 분노와 미움으로 고통받으며 원망을 쏟아냈지만, 더 큰 분노만이 치밀어 올랐다고 했다. 화를 낼수록 더욱 거칠어졌고, 결국 가슴 한편에 무거운 돌덩이만 쌓여갔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했다. 괴로워 죽을 것만 같았던 어느 날, 믿기 어려운 말이 자기 입에서 흘러나왔단다. “주님, 당신이 알아서 해주세요. 전 모르겠어요.”
그렇게 힘을 빼고 한발 물러서자, 가슴속 깊이 울분으로 남아있던 묵직한 돌덩이가 툭 하고 떨어져 나가는 것 같았다고 했다. 홀가분하다 못해 행복하기까지 했다는 그의 ‘고통’ 앞에 경외감마저 들었던 기억이 있다.
‘Passion’(수난)이라는 영어단어는 라틴어 어원인 passio에서 왔고, 이 단어는 patior라는 동사에서 파생되었다. 단순히 고통·열정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감내하기 힘든 고통을 온전히 수용하는 행위를 뜻한다. 능동적 행위인 action과 대비되는 수동적 행위로 쓰이기도 한다. 자율적인 의지나 선택이 아닌, 그저 받아들이는 행위다. 무언가를 열정적으로 하는 능동의 자세보다는 견디고 참아내며 용서하는 수용적 태도다.
“너무 괴로워 죽을 지경이다.”(마태 26,38) 예수님의 수난은 단순한 육체적 고통이 아니다. 사랑하는 이에게 배신당하는 아픔이기도 하다. 그들이 겁쟁이처럼 자신을 부인하고 도망칠 것을, 그리고 오해와 비난을 홀로 감당해야 한다는 것을, 예수님은 이미 알고 계셨다. “땀이 핏방울처럼 되어 땅에 떨어질 정도로”(루카 22,44) 고통받으셨고, “아버지, 하실 수만 있으시면 이 잔이 저를 비켜 가게 해 주십시오”(마태 26,39)라고 기도하셨다.
그리고 예수님은 힘을 빼고 한발 물러서셨다. “그러나 제가 원하는 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십시오.” 모든 것을 내려놓으셨다. ‘아버지의 뜻대로’, 사랑과 용서로 모든 것을 수용하는 거룩한 고통이다. 옷 벗김을 당하고 채찍질을 당하는 모욕 앞에서 순한 양처럼 끌려가셨다. 무력한 것처럼 보이지만 찬란하고 고요한 관조(觀照) 속으로 들어가신 것이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견디며 머무는 무위(無爲)의 고통. 행위보다는 존재로서 주도하지 않고 내어주면서 모든 인류의 죄를 짊어진 무위의 사랑이다.
살다 보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순간이 있다. 늙거나 병들어 돌봄을 받아야 할 때, 믿고 의지했던 사람들에게 오해와 비난을 받을 때, 억울하고 분해서 분노와 미움으로 죽을 것만 같을 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감에 짓눌릴 때가 있다. 하지만 맞서 싸우면 싸울수록, 힘을 주면 줄수록 고통의 무게는 더 무거워진다.
우리는 늘 무언가를 해야만 하고, 성과를 내야만 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 과잉활동에 너무 익숙한 나머지 멈춤과 수동의 상태는 무기력한 패배로 느껴진다. 활동으로 자기 존재를 증명하려는 강박 속에 우리는 자기를 착취하며 지칠 줄 모르는 일상을 살아간다. 멈추면, 포기하면, 자율성을 내려놓으면 마치 죽을 것처럼 괴롭다.
사실 아플수록, 고통스러울수록, 무거울수록 무언가를 하려고 하기보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내어 맡기는 것, 그것이 오히려 마음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이 아닐까 싶다. 모든 자율성을 포기한 수동적이고 무기력한 그 지점이 고통의 시작이기도 하지만, 고요한 관조 속으로 들어가는 평화로운 상태이기도 하다.
십자가의 길은 어쩌면 고통의 시작이 아니라, 고통의 끝일지도 모른다. 십자가를 거부하는 강렬한 몸짓은 오히려 더 크고 무거운 돌덩이가 된다. 어쩔 수 없는 포기가 아니다. 힘을 빼고 한 발 뒤로 물러서 ‘아버지의 뜻대로’ 머물 때, 고통스럽지만 고요하고, 아프지만 평온하며, 슬프지만 행복하다.
<영성이 묻는 안부>
사람들은 금메달을 따기 위해, 유명 연예인이 되기 위해, 승진하기 위해, 돈을 벌기 위해 겪는 고통은 영광스럽게 감수합니다. 때로는 그것을 자랑하기도 하지요. 하지만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오히려 부끄럽고 수치스럽기까지 한 고통도 있습니다.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을 당할 때, 감추고 싶었던 나의 약점이 드러날 때, 따돌림을 당하거나 사기를 당할 때 그렇습니다. 이런 고통은 드러낼 수도 없고, 감추자니 더욱 아픕니다. 끌어안고 놓아주지 못한 채, 가슴속에 무거운 돌덩이처럼 안고 살게 되니 고통은 더 깊어집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밀알처럼 조용히 사라지는 고통은 ‘힘’을 빼야 합니다. 마치 몸이 아파 주사를 맞거나 치료를 받을 때 힘을 주면 더 아픈 것처럼, 바다 위에서 허우적댈수록 가라앉는 것처럼 무거운 고통 앞에서 힘을 주고 바동댈수록 고통의 무게는 더 무거워집니다. “주님, 알아서 해주세요. 저는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힘을 빼고 주님 앞에 내려놓을 때, 고통의 무게는 조금씩 가벼워지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