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부활을 함께 기뻐합니다. 부활은 수난 고통 죽음을 극복한 후에 얻어지는 영광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 여정과 의미를 깊이 묵상할 때 부활을 은혜롭게 맞이할 수 있습니다.
성 금요일 수난 복음에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시면서 “다 이루어졌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마지막 순간의 한마디 말씀에서 예수님의 지상 생애 온갖 유혹, 사람들의 비웃음과 조롱, 십자가의 수모와 고통, 인성으로 겪으셨던 모든 감정이 깊이 느껴집니다. 이 모든 것을 견디시고 마지막 지상 생을 마감하시며 “다 이루어졌다”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셨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십자가 죽음으로 모든 고통이 끝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육신의 고통보다 더 큰, 하느님 아버지와 이별하시는 ‘관계의 고통’을 겪으셔야만 했습니다.
우리는 사도신경에 ‘저승에 가시어 사흗날에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셨다고 신앙을 고백합니다. 그 사흘 동안의 저승이란, 지옥과 다름 없는 처지를 뜻합니다. 성자의 지위를 모두 내려놓으시고 지옥과 다름없는 저승에서 아버지와 일치할 수 없는 애끊는 사랑의 상실을 겪으셔야만 했습니다. 사랑하는 이와 헤어짐은 너무도 큰 고통입니다. 사랑하면 함께 있어야 합니다. 홀로 남겨진 사랑은 가슴이 찢어지는 고통입니다.
바실리오 성인은 저승에 계신 예수님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습니다. ‘이 시간은 아버지는 하늘에 계시고, 아들은 생명이 없는 죽은 이들의 세계에 계시고, 두 분을 이어주셔야 할 사랑의 성령께서는 두 분과의 거리가 너무 멀어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른 채 눈물 흘리고 계시는 시간이다.’ 십자가에서 돌아가심부터 부활하시기 전까지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와 단절되신 것입니다.
사랑이신 하느님께서 온전한 사랑이 아니시게 된 것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은 성령 안에서 사랑으로 하나로 결합된 삼위일체 하느님이신데, 아버지께서는 아들에게 벌을 받는 죄인처럼 십자가 고통을 선사합니다. 아들은 그런 아버지께 이렇게 부르짖습니다.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죄를 대신하여 하느님을 잃는 고통까지 겪으시면서 하느님을 배반한 인간의 죄를 완전하게 보속하십니다. 그리고 사흘 뒤에 저 깊고 깊은 구렁 속에서 부활하십니다. 부활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가장 밑바닥까지 내려가셨다가 하느님의 지위로 다시 올라가시기를 자원하신 사랑의 사건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부활로 그렇게 ‘다 이루어’졌지만, 오늘 부활 대축일 복음에 주님께서 떠난 자리에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은듯 보입니다. 골고타 언덕 위에는 십자가만이 덩그러니 있고, 그분께서 묻히신 무덤도 비어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다 이루어졌다는 것일까요? 무엇을 이루셨다는 것일까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데 말입니다.
사랑은 모습도 색깔도 없다고 합니다. 빈 무덤처럼 자신을 온전히 내어준 빈 흔적만 남는 것이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온전한 사랑을 완성하셨던 것이지요. 그래서 빈 무덤은 사랑을 완성한 흔적이요 부활의 표징입니다. 신앙인의 여정도 빈 무덤을 향한 여정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은 자신을 비우고 내어주는 사랑을 목표로 삼아야 합니다.
다시 맞이한 부활. 예수님의 빈 무덤 앞에서 하느님 사랑을 바라봅시다. 예수님께서는 그저 무기력하게 죽어간 사형수가 아니라, 죽음을 물리치신 영광의 메시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무덤을 열고 부활하시어 우리를 구원해주시는 사랑의 하느님이십니다. 이에 우리 모두 다 함께 부활을 기뻐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