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나 특별하고 생명력 넘치는 우리 주님의 부활이 일상으로 스며들게 하는 봄의 향연을 선물 받았다! 얼마 전 우리는 교리서2부 ‘마음의 구원’편을 시작했지만 잠시 멈추고, 전례 시기가 주는 은총과 함께 주님의 부활에 우리의 부활을 묵상하려 한다. ‘육의 부활’편을 6회로 나누어서 공부하고, 다시 ‘마음의 구원’편으로 돌아오려 한다. 그래서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처럼 “그분이 빵을 떼어 주실 때야 눈이 열려 그분을 알아보았고 그분은 더 이상 그들의 눈에 보이지 않으셨다”(루카 24,30-31 참조)는 말씀의 의미가 ‘마음의 구원’편에 강하게 이어지길 바란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쓴 최초 원고를 보면, ‘육의 부활’ 교리는 3장 1편 ‘육의 부활’(64과~72과), 3장 2편 ‘하늘 나라를 위한 독신과 동정’(73과~86과)으로 종말론적 관점에서 부활을 설명했다. 그 이유는 동정과 독신의 삶이 현재 역사 안에 존재하는 시간과 영원과의 관계를 표현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속에서 죽음과 부활을 얻은 우리의 삶은 내 안, 즉 마음에서 그분의 현존을 찾는다. 왜냐하면 세례는 부활의 만남을 전제한 죽음이면서 동시에 그 부활을 일으키는 원인이며 결실인 대사건이고 그것이 우리에게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우리가 부활 성야 전례에서 촛불을 들고 세례 때 한 신앙 서약을 새롭게 갱신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러한 부활 신앙은 결의론적이고 율법적인 신앙을 벗어나 복음의 에토스가 마음에서 이루어지도록 한다.
육의 부활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던 사두가이들의 질문에서 시작된다. 공관복음(마태 22,23-33; 마르 12,18-27; 루카 20,27-40) 모두가 이를 전하지만 내용이 조금씩 다르고, 단어의 의미도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다른 부분들이 있다. 먼저 복음 간의 다름을 분석한 후 전체를 다시 바라본다면, 육의 부활에 대한 이해가 좀 더 선명해질 것이다.
예수님 시대 팔레스티나 유다인들은 야훼를 믿는 신앙인이었지만, 그들이 지닌 언어나 풍습, 민족성에 따라 당파가 지닌 종교적 색깔은 조금씩 달랐다. 사두가이파도 그중 하나로 종교적으론 보수적이었으며, 성문화된 모세오경만을 인정했다. 그들은 바리사이들과는 달리 육의 부활, 천사, 영 등 이런 일체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고(사도 23,8 참조), 영혼은 육체와 함께 죽는다고 생각했다. 또 모세오경을 통해 하느님의 계시가 완전히 이루어졌으므로 더 이상의 새로운 계시는 없을 것이라 믿었던 것이다. 정경으로 인정하는 모세오경을 바탕으로 자신들의 판단에 정당성이 있다고 믿고, 신명기 25장 5절에서 10절을 근거로 부활에 관한 믿음은 부질없음을 증명하려 했던 것이다.
그런데 성경에 대해서는 자신들이 가장 권위 있다 자부하며 성전에서 가르치던 그들에게 예수님은, 두 가지를 모르기에 잘못 생각하는 것이라 말씀하신다. “너희가 성경도 모르고 하느님의 능력도 모르니까”(마르 12,24)가 그 하나요, “나는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다”(탈출 3,6; 마르 12,26)는 의미를 모르는 것이 또 하나라 했다.
예수님은 그들이 인정하는 탈출기에서 모세가 “떨기나무 한가운데로부터 솟아오르는 불꽃 속에서”(탈출 3,2-6) 만난 하느님과의 대화를 불러오면서 부활에 관한 다른 차원을 열어 주셨다. 그리고 요한복음 11장에서 마르타에게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했고, 무덤에 묻힌 라자로에게는 큰소리로 “라자로야, 이리 나와라”하고 부르셨다. 죽은 라자로가 어떻게 주님의 부름을 들었을까? 우리가 부활에서 풀어야 할 질문들이다.
글 _ 김혜숙 막시마(그리스도 왕직 재속 선교사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