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4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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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시록으로 읽는 믿음과 삶] 처음 네 개의 봉인이 열리다(묵시 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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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인이 열린다. 숨겨진 진실이 혹은 감추어진 계시가 본격적으로 드러난다. 그 시작은 ‘오너라’(?ρχου)라는 명령형의 동사다. 헨리 바클레이 스위트(Henry Barclay Swete)와 같은 고전적 성서학자들은 ‘오너라’라는 동사에서 예수님의 재림을 갈망하는 믿는 이들의 외침을 읽어내곤 했다. 요한묵시록은 ‘오다’라는 동사를 통해 예수님의 오심을 수차례 언급하기도 한다.(1,4.7.8; 2,5.16; 3,11; 4,8; 16,15 참조) 요한묵시록 끝자락에서는 교회 공동체를 대표하는 어린양의 ‘신부’가 예수님께 ‘오시라’고 외치기도 한다.(22,17 참조) ‘오다’라는 동사를 두고 예수님과 믿는 이들의 서로에 대한 갈망과 열정이 도드라진다. ‘오너라’의 외침이 들리는 처음 네 개의 봉인은 어쩌면 예수님을 향한다는 것과 예수님을 믿고 따른다는 것이 무엇을 보고, 무엇을 생각하며, 그리하여 어느 곳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체험할 수 있는지를 일깨우는 좋은 길잡이가 될 것이다.


봉인이 열리면서 네 마리의 말이 등장하는데 각기 다른 색을 가지고 있다. 즈카르야서 6장 1절부터 8절까지에 나타나는 병거 넉 대와 말들을 떠올리기도 하고, 네 마리 말들로 인해 벌어지는 재앙들 때문에 탈출기의 열 가지 재앙과 연결해서 해석하기도 한다. 또 아니면 서기 70년, 로마에 의한 예루살렘의 함락을 ‘종말’의 징표로 이해한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해석이 네 마리 말들로 표현되었다는 의견도 있다. 무엇이건, 마지막 시대에 주님께서 직접 인간 역사 안에 개입하셔서 당신의 구원 의지를 드러내신다는 해석으로 마무리된다.



문제는 첫 번째 말의 색깔이 하얗다는 데 있다. 대개 천상의 기쁨이나 영광을 드러내는 하얀색이 다른 말들의 색깔들, 그러니까 붉고 검고 푸르스름한 색깔들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 하얀색의 말을 탄 이는 ‘활’을 들고 있는데, 구약성경은 하느님의 심판과 징벌을 이야기할 때, 활을 등장시킨다.(신명 32,41-42; 하바 3,8-9; 에제 5,16-17) 활이라는 형상은 인간 세상사 그 어떤 대목에서도 하느님의 권능과 위엄이 가득하다는, 그리하여 그 어떤 것도 하느님께 대적하지 못한다는 이스라엘 백성의 신앙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요한묵시록은 19장에서 마지막 시대, 마지막 승리자로서 백마 탄 기사, 곧 예수님을 소개한다. 6장의 백마 탄 기사는 19장의 예수님을 미리 알리는 하나의 표징으로 이해될 수 있다. 어린양이 여는 봉인의 시작은 말하자면 예수님을 계시의 첫 자리로, 그 자리에서 그 어떤 것도 예수님과 대적할 수 없다는 확고한 신앙을 갖추도록 독자를 이끈다. 첫 번째 말의 색이 하얗다는 건, 우리가 누릴 천상의 기쁨과 영광은 세상이 어떻든, 그 세상이 얼마나 아프고 슬프든, 우리에게 유일한 승리자는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믿고 바라는 데서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사실, 예수님을 믿고 따른다는 것은 꽃길만이 보장된 편안하고 행복한 길이 아니다. 어린양이 두 번째 봉인을 뜯고 나서 붉은 말이 나오는데, 그 말 위에 탄 기사는 큰 칼을 들고 있다. ‘칼’의 형상은 마지막 시대 하느님의 심판을 가리키는 전통적 형상이다.(이사 27,1; 에녹 90,19.34; 91,12) 유다의 묵시문학 작품들은 ‘칼’을 통해 메시아 시대의 갈등과 다툼, 그리고 전쟁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학자들은 요한묵시록이 쓰인 시대에 그리스도인들이 느꼈을 또 다른 마지막 시대의 징표를 로마 제국의 군사력에서 찾기도 한다. 이를테면, 무시무시한 로마의 군사력은 공포의 대상이지만 또한 비로소 마지막 시대가 도래했다는 희망의 징표로 해석되었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서로를 살해하는 일은 끔찍한 일이지만, 그 일로 파멸이 아닌 메시아 구원의 시대가 열릴 수 있다는 신앙의 해석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고백함으로 맞닥뜨리는 눈물겨운 삶을 어떻게든 살아내어야 한다는 그리스도인의 다짐일 것이다.


세 번째 봉인이 열리면서 삶의 애환과 고통은 배가된다. 세 번째 말은 기근과 결핍을 가리키는 검은 색을 지녔고 그 말 위의 기사는 저울을 가지고 있다. 네 생물 한가운데에서 나오는 어떤 목소리는 이렇게 말한다. “밀 한 되가 하루 품삯이며 보리 석 되가 하루 품삯이다.”(묵시 6,6) 하루 품삯을 한 데나리온으로 가정했을 때, 어떤 목소리가 말하는 밀 한 되의 값은 1세기 당시 거래되는 가격의 여덟 배에 가깝다. 검은 말을 타고 있는 기사의 저울은 엄청난 인플레이션에 허덕이는 경제적 상황을 상징하며 서민이 감당해야 할 힘겨움을 암시한다. 요한묵시록이 쓰였을 당시 로마의 황제는 도미티아누스였는데, 그는 포도밭을 갈아엎어 보리를 심는 정책을 펴기도 했다. 그만큼 먹고사는 데 어려움이 있었던 시기였고, 요한묵시록은 배고픈 시대의 아픔과 슬픔 안에서 신앙의 가치를 고민하고 서술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유다의 전통은 마지막 메시아 시대에 벌어지는 현상으로 빵과 포도주의 결핍을 이야기한다.(요엘 1,10-11 참조) 현실이 결핍투성이라 할지라도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 희망과 그 신앙은 결코 하느님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세 번째 봉인은 삶의 애환과 고통을 비껴가지 않는다. 그 삶을 직시하게 독자들을 이끌며, 그 속에서 각자의 신앙 자세를 다시금 다듬어 볼 여지를 살피게 한다.


네 번째 봉인이 열리면서 나타나는 말은 죽음을 이야기한다. 에제키엘서 5장 12절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하는 이 대목은 하느님을 외면하고 그분께 불충하는 백성을 향한 심판을 가리킨다. 어렵고 힘든 세상살이로 하느님을 저버리는 좌절과 포기의 삶은 죽음으로 향한다는 일종의 경고성 메시지가 네 번째 봉인을 통해 드러난다.


비록 거칠고 투박한 경고의 메시지라도 하느님을 향한 믿음을 강조하고 싶은 요한묵시록의 의도는 명확하다. 어린양이 봉인을 열면서 보여주고자 한 하느님의 계시는 결코 인간 세상의 부조리나 아픔을 외면한 유토피아를 지향하지 않는다는 것. 우리가 늘 마주하고 살아가는 인간 삶 그 안에 하느님은 당신의 뜻을 분명히 전하고 계신다는 것. 우리가 사는 삶은 지금 이 순간의 것이고 다른 세상 다른 시간을 꿈꾸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그러므로 모든 존재를 창조하신 하느님과 하등의 관계가 없는 망상이라는 사실을 요한묵시록은 우리에게 각인시키고자 한 것이리라. 그러므로 승리자이신 예수님과 더불어 지치지 말고 최선을 다해 이 삶을 살아내기를 우리는 다짐하고 또 다짐해야 할 것이다. ‘오너라’라는 그 외침을 향한 응답은 이 삶을 온전히, 열심히, 살아내는 이들의 몫이다.



글 _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대구대교구 문화홍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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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25-0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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