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4월 23일
본당/공동체
전체기사 지난 연재 기사
사랑하라 더욱 헛되이

폰트 작게 폰트 크게 인쇄 공유

신약성경 전체에서 어머니 마리아만큼 중요한 여인, 나는 부활과 예수님 그리고 막달라 여자 마리아를 생각할 때마다 부활 새벽을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고 그를 무덤에 묻었던 것은 모두가 아는 일이었을 것이다. 어머니 마리아와 십자가 밑에서 끝까지 그를 지켰던 요한조차도 돌아가고 아무도 없는 공허한 새벽, 마리아는 예수의 무덤을 찾아간다. 참으로 비합리적이고 헛된 행동이다. 어떤 심리학자는 본인의 그리움을 만족시키는 자기 위안이라고 분석할지도 모른다. ‘그게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라고 말하는 현자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마리아는 간다. 사랑 때문이었다. 사랑하기에 설사 그 사람이 죽었고, 다시는 볼 수도 만질 수도 없고, 더운 나라에서 이미 화학적 부패가 시작되었을지도 모르나 먼발치에서라도 그냥 서성이고 싶어서였을 것이다. 어리석은 일이었다.


다른 사람들의 그리움이 마리아보다 못해서 그런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마리아는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사무친 사랑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성경을 살펴보면 마리아는 그리 수선스러운 여자가 아닌 듯하다. 사람들에게 잡혀 예수께 끌려왔을 때도 먼저 말을 꺼내지 않는다. 나중에 언니 마르타가 예수를 동구 밖까지 마중 나가고 음식을 장만하고 수선을 떨 때도 그녀의 움직임은 거의 없다. 마리아를 표현하는 말은 그저 발치에 앉아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가끔 그녀가 얌전한 고양이처럼 부뚜막에 올라가는 때가 있었는데, 그건 그녀의 사랑이 사무칠 때였다. 처음이 아마도 과감히(?) 불륜을 저지를 때였을 것이고, 다음이 예수가 돌아가신 다음이고, 그리고 또 한 번이 예수의 발에 비싼 향유를 부을 때였다. 내가 그녀의 친구였다면, 나도 말렸을 것이다. 유다처럼 말했을지도 모른다. “발에 향유를 붓지 말고, 그 돈으로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렴”이라거나, “다 돌아가셨는데 무덤엔 가서 뭐하니”라고 말이다. 그러고는 생각했을 것이다. 어리석은 마리아보다 나는 현명하고 현실적이라고 말이다.


그러나 돌아보면 내 어린 시절부터 나를 일깨우는 사랑의 기억들은 대개 이런 것들이 아닌가. 갑자기 쏟아진 비 때문에 비를 맞고 걸어가는 데 우산을 가지고 빗속을 걸어오던 어머니. “이미 비 맞았는 걸 뭐?” 했지만, 그 사랑은 기억이 난다. 당연히 저녁을 먹고 들어간다고 했는데도, 상을 차려놓고 기다리시던 어머니의 사랑. “먹고 온다고 했잖아?” 퉁명을 떨었지만 어쩌면 그것이 헛되고 쓸데없었기 때문에 사랑의 기억은 고스란히 남아 내가 힘겨웠던 날에 나의 자존감을 밝히는 등불이 되어 주었으니, 사랑은 헛되어도 아니 어쩌면 헛되어서 더욱 빛나는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 묻히시고 난 새벽 헛되이 무덤을 찾아갔던 여자 마리아는 부활하신 예수를 처음 보는 월계관을 쓴다. 돌아가시기 직전에 처음 천국 티켓을 거머쥔 사람은 흉악한 범죄자 우도였는데, 이제 부활하신 예수님을 인류 최초로 뵙게 되는 영광을 받는 이는 마리아다. 둘 다 사회에서 손가락질받는 사람들이었다. 나는 이럴 때마다 예수님이 너무 좋다. 나 자신이 다른 사람을 위로할 때, 예수님 없이는 위로라는 게 완전히 불가능함을 깨닫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리스도 우리를 위하여 부활하신 오늘, 나도 가만히 생각해 본다. 더 사랑하리라 더욱 헛되이!!



글 _ 공지영 마리아 (소설가)



[기사원문보기]
가톨릭신문 2025-04-23

관련뉴스

말씀사탕2025. 4. 23

지혜 1장 1절
세상의 통치자들아, 정의를 사랑하여라. 선량한 마음으로 주님을 생각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그분을 찾아라.
  • QUICK MENU

  • 성경
  • 기도문
  • 소리주보

  • 카톨릭성가
  • 카톨릭대사전
  • 성무일도

  • 성경쓰기
  • 7성사
  • 가톨릭성인


GoodNews Copyright ⓒ 1998
천주교 서울대교구 · 가톨릭굿뉴스.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