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4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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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브리풍 이미지에 정보는 있지만 나만의 서사는 없어

[[김용은 수녀의 오늘도, 안녕하세요?] 110. ‘지브리풍(風)’ 이미지 열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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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현실보다 더 실재같은 현실을 찍어내는 인공지능 세상에 살면서 실존적 빈곤을 겪고 있다. OSV
만화를 즐겨보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이야 만화나 웹툰이 하나의 대중문화로 열광적 사랑을 받고 있지만, 그 당시만 해도 만화는 ‘불량 서적’으로 치부되곤 했다. 그러나 나에게 만화는 일상의 활력소였다. 이상무의 감동적인 가족만화 속 주인공 ‘독고탁’에게 푹 빠져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맛보았고, 믿고 읽는 엄희자표 순정만화의 감성에 흠뻑 젖기도 했다. 만화는 단순한 오락이 아닌, 상상력과 정서적 치유의 매개였고, 무엇보다 서사와 영혼이 담긴 세계였다.

이런 감성적 이미지가 지닌 힘은 오늘날 새로운 방식으로 다시 떠오르고 있다. 최근 챗GPT가 촉발한 ‘지브리풍(風)’ 이미지 열풍이 거세게 불고 있다. 유행이나 스타일로 해석되는 바람의 ‘풍’이 강렬한 기술적 바람을 타고 번진다. 인공지능에게 ‘지브리풍으로 그려줘’ ‘눈을 더 크게 해줘’ 같은 명령어만 주면 금세 아기자기하고 감성적인 이미지가 만들어진다. SNS에는 온통 이 감성 이미지들이 넘쳐난다. 하지만 그 이미지에는 ‘이야기’가 없다. 사람의 시간과 감정이 녹아든 고유한 혼보다는, 빠르게 생산되고 쉽게 소비되는 정보로서의 이미지일 뿐이다.

오픈 AI의 생성형 인공지능 챗GPT는 지브리풍 그림체를 손쉽게 흉내 낼 수 있고, 또 그 이미지에 수많은 사람이 열광한다. 그러나 지브리의 본질은 단순한 ‘풍(風)’이 아니라 창작자의 영혼이 담긴 ‘혼(魂)’이다. 고통스러운 수작업, 생명에 대한 깊은 사유, 전쟁과 자연에 대한 치열한 내면의 투쟁이 담긴 지브리의 애니메이션은 ‘그림’이 아닌 ‘삶’이다.

그래서일까? 지브리 스튜디오의 창시자인 미야자키 하야오는 인공지능 기술이 그려낸 애니메이션을 가리켜 ‘삶에 대한 모독’이며 심지어 ‘역겹다’라고 표현했다. 오랜 시간과 노력을 기울여 그림체와 화풍을 구축하는 창작자들에게는 몇 초 만에 유사한 이미지를 구현해내는 인공지능이 모욕적으로 느껴질 수밖에 없다. 한 땀 한 땀 수작업을 거쳐 창작하는 이들에게는 이 빠른 복제의 이미지들이 당혹스러울 것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이 지브리풍 이미지에 강하게 끌린다. 인공지능이 만들어낸 지브리풍의 ‘나’는 현실보다 더 다정하고 더 아늑하고 더 따스하게 보인다. 무해한 세상에 머물고 싶은 욕망을 채워주고, 나를 지키고 싶은 불안으로부터 심리적 방어를 제공한다. 현실보다 더 괜찮은 ‘보이는 나’에 익숙해지면서, 진짜 ‘존재하는 나’를 점점 밀어낸다.

이러한 현상은 단순한 이미지 소비로 끝나지 않는다. 실제 인간관계에서의 따뜻한 공감 대신 이미지가 제공하는 감정적 공감에 만족하게 된다. 이미지 소비가 실존적 빈곤을 낳는다. ‘보이는 나’에 갇힌 우리는 점차 자신의 이야기, 자기만의 고유한 서사를 잃어버린다. 지브리풍 이미지 열풍은 어쩌면 현대인의 불안과 소외, 퇴행적 욕망이 투영된 감정의 반영일지도 모른다. 다정하고 아늑한 세계 속에서 우리는 잠시나마 불확실한 현실로부터 도피하고, 꾸며진 이미지 속에서 더 나은 나를 꿈꾼다. 그러나 그 ‘따뜻함’은 진짜 삶의 온기가 아닌, 잘 정제된 이미지의 감각일 뿐이다. 인공지능이 만들어내는 ‘보이는 나’는 때로는 진짜 ‘존재하는 나’를 가린다.

정보로 나를 표현하고 이미지로 자신을 브랜딩하며 살아가는 이 시대, 우리는 고통스럽게 자기 삶을 ‘서사’로 써 내려가는 일이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지브리풍 이미지에는 정보는 있지만 서사는 없다. 경제적 불안·사회적 갈등·개인의 위기라는 불확실한 현실 속에서 ‘지속적인 자기 서사 쓰기’에 지친 현대인의 욕망이 이 감성 이미지에 투영된다. 결국 어떻게 ‘살아가느냐’보다 어떻게 ‘보이느냐’가 더 중요한 시대다. 나는 내가 살아내는 존재(I)가 아니라, 누군가에게 보이는 상품(Me)으로 존재하게 된다. 그래서 묻는다. 서사를 잃지 않고, 보이는 이미지에 잠식당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인공지능과 함께 살아갈 것인가?


<영성이 묻는 안부>

독일의 철학자 하이데거는 ‘현존재(Dasein)’라는 개념을 통해 인간 존재는 본질적으로 불확실하며, 그 불확실함을 풀어가기 위해 끊임없이 자기만의 서사를 써내려간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는 그런 서사를 구성하는 데 점점 더 어려움을 겪고 있는 듯합니다. 서사적 성찰이 부족해지면서 나만의 이야기를 잃고 ‘서사 없는 나’, ‘정보로서의 존재’로 살아가는 것이 오히려 더 편안하게 느껴지곤 합니다. 이제는 어떻게 사느냐보다 어떻게 보이느냐가 더 중요해진 시대가 된 것이지요.

철학자 한병철은 우리 삶이 ‘스토리텔링’이 아닌 ‘스토리셀링’이 되어가고 있다고 말합니다. 존재의 깊은 경험보다는 팔기 좋고 보기 좋은 삶의 외형을 만들어낸다는 것입니다. 그럴듯하게 포장된 ‘나’는 상품이 되어 현존의 경험이 사라져버린다는 건데요. 참으로 두려운 진단입니다. 현존의 경험이 없다면, 우리에겐 아무것도 남지 않기 때문입니다. ‘현존’이야말로 우리 신앙의 중심이자 근간입니다. 지금, 이 순간을 온전히 살아가면서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합니다. 그리고 그 현존은 곧 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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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5-0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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