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은 수녀의 오늘도, 안녕하세요?] 112. 가정
프란치스코 교황이 생전 대중 일반 알현 때 한 가족과 인사를 나누며 축복해주고 있다. OSV
고난이 와도 고통받지 않고, 불공평한 조건에도 만족하며, 사랑하지 않아도 행복할 수 있는 세계가 있다. 태아 때부터 수면암시 교육을 통해 흙수저든 금수저든 각자에게 주어진 계급에 만족하도록 세뇌당하고, 슬픔이나 분노의 감정은 마약성 항우울제 ‘소마’를 복용해 억제한다.
‘만인은 만인의 공유물’이라는 원칙에 따라 성적 욕망은 자유롭게 소비되고, 아이는 인공수정과 인큐베이터를 통해 대량 생산된다. 결혼제도는 사라지고 ‘가정’ ‘어머니’ ‘아버지’라는 단어조차 외설스럽게 여겨진다.
이 세상은 올더스 헉슬리가 1931년 발표한 소설 「멋진 신세계」에 등장하는 세계다. 철저히 통제된 쾌락 사회, 그리고 인간다움이 상실된 미래를 그려낸 이 소설 속 세계에는 사랑도, 고통도, 가정도 존재하지 않는다.
문득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는 어떤지 되묻게 된다. 우리의 사랑은 점점 책임을 지지 않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내꺼인 듯 내꺼 아닌 내꺼 같은 너”라는 대중가요 가사처럼 이른바 ‘썸’ 문화는 단순한 연애방식을 넘어 감정을 소비하는 우리 시대의 정서를 반영하는 축소판인지도 모른다. “연애는 필수, 결혼은 선택”이라는 말처럼 이제 결혼은 삶의 필수조건이 아니다. ‘평생의 동반자’나 ‘결혼의 완성은 자녀’라는 말 역시 점점 낡은 구호가 되어가고 있다. 이는 단지 시대의 변화가 아니라, 사랑의 본질 자체가 흔들리고 있다는 신호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어느 때보다 풍요로운 시대를 살고 있다. 그러나 이제 사랑과 책임마저 경제력으로 환산된다. 그래서일까? 책임이 따르는 결혼과 출산은 ‘선택사항’으로 밀려났다. 비혼을 택하거나, 설령 결혼하더라도 출산을 꺼리는 경향이 짙어졌다. 경제적 불안과 육아의 부담 그리고 개인 삶을 우선하는 욕망 이 혼인과 출산을 주저하게 만든다. 결국 ‘가정’이라는 말조차 점점 낯설어지고, ‘아버지’ ‘어머니’라는 단어도 박제된 옛말처럼 들리게 되는 세상이 올지 모른다.
「멋진 신세계」가 보여주는 디스토피아는 어쩌면 먼 미래의 우화가 아닐지도 모른다. 지금 우리 현실은 이미 ‘가정’이라는 개념 자체가 변화하고 있으며, 공동체보다 개인의 자유와 욕망이 우선인 사회로 흐르고 있다. 사랑에는 분명 책임이 따른다. 기다림과 인내, 때로는 포기와 헌신이라는 무거운 단어들이 함께한다. 그러나 오늘날 사랑과 결혼으로 이어지는 ‘가정’은 ‘경제적 부담’이나 ‘자기실현’을 방해하는 요소로 인식되기도 한다. 책임지지 않는 관계,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썸’은 소셜미디어 친구 관계처럼 원할 때만 가까워지고, 원하지 않으면 쉽게 끊을 수 있는 관계다. 가볍고 편리하지만, 그만큼 취약하고 외롭다.
쾌락은 외부 자극에서 오지만, 진정한 기쁨과 행복은 책임의 무게를 감내하며 맺어진 깊은 내면의 관계에서 비롯된다. 익숙해진 습관적 쾌락은 점점 더 강한 자극을 요구하고, 자극이 고갈되면 우리는 쉽게 공허에 빠진다. 그러나 버티고 기다리며, 상처받고 다시 회복되는 과정을 통해 이루어진 ‘가정’은 결코 쉽게 끊기지 않는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준다.
헉슬리의 소설 속에서 유일하게 ‘가정’에서 태어난 인간 존은 공장식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소외된다. 그는 절규한다. “나는 불행할 권리를 원한다! 고통받을 권리를! 사랑하고, 아이를 낳을 권리를!” 책임지고 사랑하며 가정을 꾸리는 삶은 분명 쉽지 않다. 때로는 지치고 상처받으며, ‘불행’이라 느끼는 순간도 찾아온다. 그럴 때 우리는 스마트폰을 열고 스크린에 빠져든다. ‘소마’처럼 불편한 감정을 지워주는 방식으로 감정을 소비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는 사이, 불편하고 고되지만 진주처럼 빛나는 행복의 학교, ‘가정’을 점점 잊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가난했던 시절 우리는 왜 그렇게 ‘가정’을 소중히 여겼을까? 돌아보면 가난했지만 가족애는 더 끈끈하고 인간다웠다. 그 시절 가정의 사랑에는 조건이 없었고, 서로에 대한 책임은 당연한 일이었다. 함께 나이 들고 늙어가는 것을 행복이라 여겼다. 가정은 선택이 아니라,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가기 위한 필수 조건이다. 삶의 유일한 출발점이자 종착지다. 가정은 ‘작은 교회’이며, 사랑을 배우는 첫 학교다.
「멋진 신세계」가 경고하듯 가정이 사라진 사회에서는 인간다움도 함께 사라진다. 우리가 ‘가정의 달’에 가정을 기억하고, 되살리며, 그 소중한 의미를 다시금 곱씹는 이유다.
<영성이 묻는 안부>
하느님은 인간을 사랑으로 창조하시고, 그 사랑이 자라날 터전으로 ‘가정’을 주셨습니다. 가정은 사랑을 살아내는 사람됨을 배워가는 삶의 훈련장이며 하느님 사랑을 닮아가는 아름다운 ‘작은 교회’입니다. 즉흥적이고 가벼운 관계가 넘쳐나는 디지털 시대에 ‘사랑이란 무엇인가’를 깊이 체험하고 배울 수 있는 마지막 보루가 바로 가정이 아닐까 싶습니다. 물론 가정 안에서도 서로 상처를 주고받는 일이 생기지만, 그 상처를 함께 치유하며 더 깊은 사랑으로 자라나는 곳, 서로를 품고 용서하며 단단한 관계로 나아가는 곳이 바로 가정입니다.
초대 교회 신자들이 함께 삶을 나누고 기도하며 공동체를 이루었듯 오늘날 우리의 가정 안에서도 나눔과 친교의 신앙을 살아가며, 가장 아름다운 공동체인 ‘가정’을 지켜나가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