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5월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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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해·회심은 용서를 위한 최소한의 전제 조건

[박병준 신부의 철학상담[ 19. 용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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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상담에서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는 주요 방법으로 이해되는 용서는 전통적으로 종교성이 짙은 개념인데, 철학적으로 주목을 받게 된 계기는 프랑스의 두 철학자 얀켈레비치(Vladimir Jankélévitch, 1903~1985)와 데리다(Jacques Derrida 1930~2004)의 논쟁을 통해서다.

나치 치하에서 자행된 반인륜적 범죄를 두고 ‘처벌’과 ‘용서’ 사이에서 고뇌했던 두 철학자는 ‘세상에는 도저히 용서받지 못할 죄가 존재하는가?’라는 근본적인 물음을 던진다. 얀켈레비치는 1967년에 출간한 「용서」(Le pardon)에서 ‘용서의 절대적 무조건성’을 주장하지만, 1971년 출간한 「공소시효 없음」(L’imprescriptible)에서는 유다인 대량 학살과 같은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죄(근본 악)’도 있음을 인정한다. 인간이 스스로 감당하기 힘든 악이 존재하며, 그로 인한 상처와 고통은 결코 사라지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렌트(Hannah Arendt, 1906~1975)는 “인간은 처벌할 수 없는 것을 용서할 수 없으며,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을 처벌할 수 없다”고 말한다. 이에 반해 데리다는 “용서란 이름에 합당한 용서란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그 지점에서 시작된다”면서 “용서에 관한 담론은 역설적으로 용서할 수 없는 것과 함께 시작된다”고 주장한다.

용서란 옳고 그름을 따지거나 배분의 균형을 이루는 행위와 무관하다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정의와 구별된다. 용서의 본질은 이미 일어난 일을 없던 일로 함으로써 부정적인 사건을 긍정적인 사건으로 만드는 데 있다. 물론 이때 우리가 용서를 통해 부정적인 일 혹은 사건을 부정하거나 망각한다는 의미는 절대 아니다. 이미 일어난 일은 돌이킬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이 특히 우리 영혼에 깊은 상처를 주거나 영혼을 파괴한다면 그 영향은 더욱 크게 미칠 것이다. 우리 영혼에 상처를 남기는 부정적 사건은 시간이 지나도 잊히지 않으며, 특정한 상황 속에서 반복되어 기억되거나 불현듯 떠올라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미 일어난 일을 없던 일로 함으로써 서로 용서받고 용서할 수 있는 것일까? 과연 그것이 가능할까? 그리스도교는 용서의 근본적 가능성을 믿을 뿐 아니라 가톨릭교회의 경우 고해성사를 통해 이를 제도적으로 구현하고 있다. 그런데 그리스도교의 용서는 근본적으로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용서를 의미한다. 문제는 용서가 상처를 주고받은 당사자들 사이에서 성립되어야 함에도 간혹 당사자들 사이의 화해 없이 용서를 언급하곤 한다는 것이다. 영화 ‘밀양’으로 잘 알려진 이청준의 소설 「벌레 이야기」는 이 문제를 다룬다.

화해와 회심은 용서를 위한 최소한의 전제 조건이다. 인간의 관점에서 용서의 주체(용서하는 자)와 객체(용서받는 자) 상호 간의 화해와 회심없이 용서를 기대하기란 사실 불가능하다. 더 중요한 사실은 쌍방 간의 화해와 회심이 전제되더라도 이미 일어난 일은 돌이킬 수 없으며, 그로 인한 상처 또한 영원히 영혼의 흔적으로 남는 만큼 용서는 결코 일회적 행위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상처를 치유하는 용서는 거듭 반복되어야만 하는 행위로서 이를 가능하게 하는 힘은 다름 아닌 절대적 긍정의 절대적(초월적·은총적)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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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5-0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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