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5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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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 속에서도 희망 잃지 않으려면 ‘역설적 신앙’ 필요

[박병준 신부의 철학상담] 21. 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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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들어오는 자들이여, 모든 희망을 버려라.” 단테(1265~1321)의 「신곡」 지옥 편에서 지옥문에 적혀 있는 문구다. 희망은 인간의 삶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다. 희망이 없는 삶은 지옥과 같다. 그런 점에서 인간에게 희망이 무엇인가에 대한 철학적 물음은 매우 중요하다.

그리스 신들의 기원(계보)을 묘사한 헤시오도스의 「신통기」에 있는 ‘판도라의 항아리(상자)’는 ‘희망’에 관한 수수께끼 같은 이야기를 전한다. 제우스가 자신의 불을 훔쳐 인간에게 선물한 프로메테우스에게 벌을 내린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불로 강력해진 인간에게 재앙을 내리기 위해 그의 동생 에피메테우스에게 판도라라는 여인을 선물로 보낸다. 호기심 많은 판도라가 열지 말아야 할 항아리를 열어 온갖 재앙이 세상에 들어오게 되었으며, 놀란 판도라가 항아리를 닫자 미처 나오지 못한 희망만이 항아리에 남게 된다. 이 이야기가 전하는 말은 무엇일까? 마치 ‘희망 고문’을 하듯이 본래 희망은 재앙의 하나라는 것일까? 아니면 재앙 속에서도 여전히 우리에게 희망이 있다는 것일까?

프랑스 실존철학자 마르셀(1889~ 1973)은 희망(espérance)은 욕망(désir)이나 염원(souhait)과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라 주장한다. 욕망과 염원은 내 존재 밖에 근거하고 있는 기대 가능한 소유에 속하지만, 희망은 소유 불가능한 존재에 속한다. 다시 말해 희망은 한계 상황 속에서 실존적으로 느끼는 존재의 감정이자 나를 존재하게 하는 힘인 존재에의 응답이다.

인간은 비극적이며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희망이 있기에 이를 견디어 낼 수 있다. 마르셀은 역설적이지만 시련이 없는 곳엔 희망도 없다고 말한다. 우리의 영혼은 희망에 의해서만 존재한다고 말한다. 시련이 있기에 희망이 싹트며, 그 희망은 비대상적이고 비소유적이며, 오로지 자기 존재 자체에서 근원하는 ‘존재에의 용기’이자 ‘존재에의 기쁨’이다. 그렇기에 희망하는 것만으로도 삶을 포기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

희망은 확실한 근거가 있는 확신이나 신념과 다르게 당위성을 넘어서 있는 비약이자 도약이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망망한 바다에서 표류하는 인간에게 희망은 언제 올지 모를 구원의 손길이기보다는 오히려 자기 존재를 지탱하고 견디는 인내 외에 다른 것이 아닐 것이다. 물론 시련 속에서 자기 존재 전체를 감당하는 인내가 쉬울 수는 없기에 우리는 절대적 존재(하느님)에 기대곤 한다. 그래서 칸트(1724~1804)는 “희망은 오직 도덕에 종교가 첨가되는 경우에만 비로소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희망의 부재는 절망을 낳는다. 키르케고르(1813~1855)에 의하면 절망은 ‘자기 자신과의 관계의 엇갈림’에서 발생한다. 그러나 절망의 순간에도 인간은 진정으로 자기 자신이 되고자 함으로써 희망을 품을 수 있다. 키르케고르는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기 위해서는 이사악을 희생제물로 바치는 아브라함의 믿음에서 보듯이 부조리한 ‘역설적 신앙’이 필요함을 강조한다.

희망은 절망의 대립 개념이지만 절망에 대한 반항이나 도피를 의미하지 않는다. 반항이나 도피는 또 다른 절망의 모습일 뿐이며, 오히려 희망은 절망 속에서도 자기 됨을 포기하지 않는 굳건한 믿음에 근거한다. 믿음은 희망을 싹트게 하며, 희망은 믿음을 견고하게 하며 자라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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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5-0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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