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전승은 작은 야고보로 불리는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가 주님의 형제인 야고보와 같은 인물로 예루살렘 사도 회의를 열어 이방계 그리스도인들에게 할례를 받지 않고 신앙생활을 하는 길을 열어주었다고 한다. 페드로 오렌테 작 ‘작은 야고보 사도의 순교’, 유화, 1639년, 스페인 발렌시아 벨 예술 박물관.
신약 성경에는 ‘야고보’라는 이름을 가진 이가 세 명 등장합니다. 이들 중 제베대오의 아들이며 요한의 형인 야고보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는 예수님께서 뽑으신 사도들입니다. 이 둘을 구분하기 위해 제베대오의 아들을 ‘큰(大) 야고보’라 하고, 알패오의 아들을 ‘작은(小) 야고보’라 부릅니다.(마태 10,3; 마르 3,18 ; 루카 6,15 ; 사도 1,13) 나머지 한 명은 예수님과 형제(마르 6,3; 마태 13,55-56)이며 ‘베드로와 요한 사도와 함께 예루살렘 교회의 기둥’(갈라 2,9)으로 존경받는 ‘주님의 형제 야고보’(갈라 1,19)입니다.
교회는 전통적으로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주님의 형제 야고보를 같은 인물로 봅니다. 유다 역사가 플라비우스 요세푸스가 이 둘을 동일 인물로 소개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신약 성경 경전 중 하나인 ‘야고보 서간’을 알패오의 아들로 주님의 형제인 야고보 사도가 쓴 것으로 여겨오고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성경학자들 사이에선 알패오의 아들과 주님의 형제인 야고보가 같은 인물이 아니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그 이유로 “사실 예수님의 형제들은 그분을 믿지 않았다”(요한 7,5) “예수님의 친척들이 소문을 듣고 그분을 붙잡으러 나섰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마르 3,21)라는 복음서의 증언처럼 예수님의 형제 곧 친척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지 않았기 때문이라 합니다.
또 예수님께서 고향 나자렛 사람들에게서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로서 마리아의 아들이며 야고보, 요세, 유다, 시몬과 형제간이 아닌가?”라는 말을 들으며 배척당하셨을 때에는 이미 열두 사도들과 함께 활동하고 계셨다고 설명합니다.(마르 6장 참조) 그리고 무엇보다 신약 성경은 예수님의 제자들과 사도들, 그리고 주님의 형제들을 언제나 구별하고 있다고 강조합니다.(사도 1,13-14; 1코린 9,5; 15,5-8) 또 야고보 서간의 저자는 ‘알패오의 아들’ ‘주님의 형제’라고 하지 않고 “하느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로 자신을 소개하고 있어 같은 인물로 볼 수 없다고 합니다.
이처럼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가 주님의 형제인 야고보와 같은 인물이 아니라고 한다면 사실상 신약 성경에서 그가 작은 야고보라 불렸다는 것 외에는 어떠한 행적도 확인할 수 없습니다.
아! 다른 하나가 있네요. 그의 어머니가 성모 마리아와 함께 예수님 죽음을 지켜봤고, 주님의 부활을 증거하는 빈 무덤을 목격한 성모님 친척인 ‘클로파스의 아내 마리아’라는 사실입니다. “거기에는 많은 여자들이 멀리서 지켜보고 있었는데 그들은 갈릴래아에서부터 예수님을 따르며 시중들던 이들이다. 그들 가운데에는 마리아 막달레나,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 제베대오 아들들의 어머니도 있었다”(마태 27,55-56) “여자들도 멀리서 지켜보고 있었는데, 그들 가운데에는 마리아 막달레나, 작은 야고보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 그리고 살로메가 있었다”(마르 15,40)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는 그분의 어머니와 이모, 클로파스의 아내 마리아와 마리아 막달레나가 서 있었다”(요한 19,25) “무덤에서 돌아와 열한 제자와 그 밖의 모든 이에게 이 일을 다 알렸다. 그들은 마리아 막달레나, 요안나, 그리고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였다”(루카 24,9-10) 등이 소개됩니다.
이제 학자들의 주장이 아니라 교회 전통에 따라 작은 야고보 사도를 소개합니다. 이미 밝힌 대로 교회 전통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로 활동했던 주님의 형제 야고보를 같은 인물로 봅니다. 그는 큰 야고보라 불리는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가 44년 4월께 예루살렘에서 헤로데 아그리파 1세에 의해 참수돼 순교한 후 예루살렘 교회를 맡아 사도직을 수행했습니다.(사도 12장 참조)
그는 예루살렘 사도 회의를 열어 이방인들을 할례 없이 교회로 받아들일 수 있다고 선포했습니다. 당시 교회 구성원의 한 축인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한 축인 이방계 그리스도인들에게 유다교 율법을 따를 것과 할례를 받을 것을 강력히 요구했습니다. 당연히 이방계 그리스도인들은 이를 거부했지요. 그래서 사도들은 이 난제들을 신속하게 해결해야 했습니다.
이때 작은 야고보 사도는 모든 사도가 동의한 해결책을 제시합니다.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이방인들이 할례를 하지 않아도 되지만, ‘모세의 정결례 법’만은 준수해야 한다고 선포합니다. 곧 우상에게 바쳤던 고기를 먹는 우상숭배 행위와 불륜, 그리고 목 졸라 죽인 짐승의 고기와 피를 멀리하라는 것이었습니다.(사도 15장 참조) 이처럼 작은 야고보 사도는 베드로와 요한 사도와 함께 초기 교회의 중추적 역할을 했습니다.
아울러 그는 야고보 서간을 통해 그리스도인에게 신앙을 실천할 것을 권고합니다. 야고보 서간은 그리스도교 신앙이 삶에서, 무엇보다 이웃 사랑과 가난한 이들에 대한 헌신에서 완성되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하느님 아버지 앞에서 깨끗하고 흠 없는 신심은, 어려움을 겪는 고아와 과부를 돌보아 주고, 세상에 물들지 않도록 자신을 지키는 것입니다.”(야고 1,27) “영이 없는 몸이 죽은 것이듯 실천이 없는 믿음도 죽은 것입니다.”(야고 2,26)
1세기 말 저서 「유다 고대사」에서 플라비우스 요세푸스는 작은 야고보 사도가 62년 예루살렘 최고 의회 대사제 아나니아(사도 23장 참조)의 명으로 돌에 맞아 순교했다고 합니다. 반면 에우세비오 「교회사」는 야고보 사도가 성전 꼭대기에서 내던져졌음에도 죽지 않아 몽둥이질을 당해 순교했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