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교 사상에 따르면 인간은 ‘죄스러운 존재’다. 교부학자인 아우구스티누스(354~430)는 악의 형이상학적 실체를 부정하면서도 악의 현상이라 할 수 있는 죄의 실체를 인정하고, 오히려 이를 인간의 종교적 실존 자각의 중요한 계기로 삼는다. 죄는 인간의 삶에 깊숙이 침투하여 악한 현상을 낳고, 인간을 고통으로 내몰 뿐 아니라 인간 영혼에 지울 수 없는 깊은 상처의 흔적을 남기곤 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유의지론」에서 죄의 현상을 인간의 자유의지에 근거해 설명한다. 인간의 자유로운 정신으로부터 죄의 근원적 현상을 설명하는 것은 신의 완전성에 따라 죄의 형이상학적 실체를 부정할 수밖에 없는 그리스도교 사상의 관점에서 합리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죄의 현상을 완전히 구명하고 이해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현대 실존철학자 키르케고르(1813~1855)는 “형이상학은 죄를 붙잡을 수 없고, 심리학은 죄를 극복할 수 없으며, 윤리학은 죄를 무시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사실 죄는 어떤 가능 능력을 지닌 상태로 잠재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 ‘죄스러운 존재’라고 하는 것은 인간이 본성적으로 자기 안에 죄성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보다는 인간의 행위 실행과 함께 죄성이 현실로 드러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죄’와 ‘죄성’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키르케고르에 의하면 죄는 질적 범주 개념인 반면 죄성은 양적 범주 개념이다. 아담이 지은 ‘최초의 죄’에서 보듯이 죄는 근본적으로 실존적인 질적 비약을 통해 우리 자신에게 들어오는 ‘허물’이자 ‘책임’이며, 이런 실존적인 질적 비약이 정신적으로 무지의 상태를 벗어나는 도덕적 인식의 깨어남에서 발생한다면, 죄성은 인류의 보편적인 ‘죄 있음’ 상태를 의미한다. 이는 세대를 거쳐 전해지면서 우리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죄의 가능성, 즉 죄의 ‘실제적 가능성’은 오로지 인간의 자유로운 정신에 근거한다. 인간이 자유로운 정신을 갖고 있지 않다면, 애당초 죄의 가능성 아래 떨어지지 않았을 것이며, 죄 또한 세상에 들어올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리스도교의 ‘원죄’ 교리는 최초로 세상에 들어온 죄의 기원과 그로 인한 인류의 죄성에 관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이는 죄와 죄성 사이에 개인의 죄가 인류의 죄성으로, 인류의 죄성이 개인의 죄로 침투하는 순환적 관계가 놓여있다는 뜻이다.
인간은 정신적으로 무한한 ‘자유의 가능성’ 앞에 선 존재다. 매 순간 자기 자신과의 관계 정립을 통해 진정한 ‘자기 존재’가 되고자 하지만, ‘할 수 있음’이라는 무한한 자유의 가능성과 그 책무 앞에서 역설적으로 자신을 불안케 하는 가능성에 내몰려 있다. 인간이 죄책을 느끼는 것은 일차적으로 바로 이런 불안에 근거한다. 자유의 가능성 앞에서 최선의 행위를 하려고 노력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자기의 유한성과 한계를 경험하고 자신의 행위를 결코 절대적으로 끌어올릴 수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기 때문이다.
실존주의 철학자 야스퍼스(1883~ 1969)는 이런 한계상황을 근본상황으로서의 ‘죄책’으로 규정한다. 우리는 모두 죄책의 근본상황이자 한계상황을 벗어날 수 없다. 왜냐하면 세계에서 행해지는 모든 행위는 우리가 미처 인식하지 못하는 결과를 빚으며, 이에 대한 책무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