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은 수녀의 오늘도, 안녕하세요?] 116. 진정성
나의 진정성은 타인의 눈과 세상의 틀 안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면 깊은 곳에서 정직하게 깨어나는 것 아닐까. 신자들이 성당에서 기도하고 있다. OSV
“제 진심을 믿어주십시오. 국민만 바라보고 가겠습니다.” 선거철마다 정치인들이 감성적인 슬로건을 내세우거나 눈물을 흘리며 유권자에게 다가가는 모습은 이제 더이상 낯설지 않다. 기업은 “지름길보다 바른 길을 선택합니다” “50년, 변함없이 같은 마음으로” 같은 광고 문구로 ‘진정성’을 팔고, 연예인과 인플루언서들도 ‘진정성’을 증명하려 애쓴다.
앤드루 포터는 「진정성이라는 거짓말」에서 “진정성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진정성 없는 것이 무엇인지는 직관적으로 안다”고 말한다. 누구나 진정성을 원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는 말하기 어렵다. 우리는 ‘진짜’에 대한 갈증으로 진정성을 욕망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이 갈망은 진정성의 결핍에서 비롯된 욕망의 투사이며, 정치적으로는 선전의 도구로, 상업적으로는 마케팅 전략으로 활용된다.
그러나 진정성은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살아내는 것이다. 존재에 대한 본질적 자각과 내면의 일관성이 동반되어야 한다. 누군가 무릎을 꿇고 “진심을 믿어달라”고 호소하거나, 타인에게 “진정성을 보여달라”고 요구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행위만으로는 진정성이 증명되거나 확인될 수 없다.
사실 타자는 철저히 ‘나와 다른 존재’다. 그러니 낯설고 불편하게 느껴지는 것은 당연하다. 그래서일까. 우리는 타인이 나와 얼마나 비슷한가에 따라 진정성을 판단하곤 한다. 내 생각에 동조하고, 내가 지지하는 정치인이나 정당에서 쉽게 ‘진정성’을 발견한다. 어쩌면 우리가 말하는 진정성이란, 나의 기대와 욕망이 만들어낸 기준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우리는 어느새 타자에게 점점 ‘나와 같음’을 강요하게 된다.
디지털 시대의 알고리즘은 이런 심리를 더욱 강화한다. 나와 비슷한 것만 보여주고, 비슷한 것에만 반응하게 만든다. ‘좋아요’와 ‘공감’의 회로 속에 갇혀 나와 닮은 사람에게서만 진정성을 느끼려 한다. 그러나 이처럼 반복되는 익숙함 속에서 진정성은 점점 왜곡된다. 타자를 마치 나의 복제물처럼 만들고, ‘나와 닮은’ 존재로 소유하고 소비하려 한다. 그렇게 타자와의 경계는 흐려지고, 진정한 교감은 사라지며, 관계는 점점 더 피상적으로 변해간다.
진정성은 ‘낯섦’이라는 문턱을 넘을 때 비로소 깨어난다. 익숙함 속에는 놀라움도 깨달음도 없다. 오히려 이질적이고 불편한 대면 안에서야 비로소 진짜가 드러난다. 원효 스님은 당나라로 유학을 떠나던 길, 밤중에 갈증을 느껴 바가지에 담긴 물을 마신다. 그러나 날이 밝아 그것이 해골 속 물이었음을 알게 되자 물맛은 혐오로 바뀐다. 그 순간 스님은 깨달음을 얻는다. 더럽고 깨끗한 것은 사물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마음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낯선 해골 앞에서 마음을 밀쳐내지 않았던 그 순간 그는 비로소 자신의 참된 마음과 마주한다. 진정성은 외부 조건이 아니라 마음의 자리에서 비롯된다.
현대 사회는 반복되는 ‘같음’에 안주하면서 진정성을 잃어가고 있다. 우리는 타인의 기준에 맞추고, 디지털 이미지로 자아를 연출한다. 그렇게 ‘같은 것’을 반복하는 사이, 본래의 ‘진짜 나’를 놓치고 있는지도 모른다. 더 이상 남들의 기대에 맞춘 ‘가짜 나’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지으신 본래의 ‘참된 나’로 살아가는 것, 바로 거기서 진정성이 시작된다.
진정성은 단지 솔직한 태도를 넘어 참되고 바른 본성이며, 하느님께서 지으신 그대로의 성품이다. 우리는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된 존재다. 그러기에 진정성은 ‘본래의 나’를 향해 나아가는 여정이며, 하느님의 창조 의도에 충실하게 살아가려는 삶의 자세이기도 하다.
진정성은 깊은 영성적 태도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하느님을 알 때 비로소 나를 알고, 그분 앞에 머물 때 비로소 쉴 수 있다”고 말했다. 참된 자아 인식은 오로지 하느님 안에서만 가능하며, 그 안에서 진정한 안식을 누릴 수 있다.
예수님의 거룩한 마음 안에 머물며 기도하고 관상할 때, 우리는 점차 본래의 나를 회복해간다. 그래야 마침내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참 좋았다” 하신 바로 그 모습으로 내가 되어가지 않을까.
<영성이 묻는 안부>
타인의 기준과 사회적 규범에 맞춘 삶 속에서 우리는 과연 진정성을 느낄 수 있을까요? 누구나 ‘진짜 나’를 찾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그 바람조차도 타인의 시선이나 인정에 길들여진 것이라면, 이미 진정성은 왜곡되어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원효 스님의 일화는 깊은 울림을 줍니다. 깨끗함과 더러움은 사물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마음’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요.
그렇다면 진정성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타인의 눈과 세상의 틀 안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면 깊은 곳에서 정직하게 깨어나는 것이겠지요. 가짜가 너무 많은 세상입니다. 그래서 더더욱 우리는 ‘참 나’, 곧 태초에 하느님 모상으로 지어진 본래의 나를 향해 돌아가야겠습니다. 거기서 비로소 참된 안식을 누릴 수 있을 테니까요. 그러기 위해 우리 마음이 예수님의 성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진정성은 외부의 인정이 아니라, 예수님을 모신 마음 안에서 숨 쉬고 되살아나는 것이니까요. 예수 성심이여, 당신의 마음과 저의 마음이 같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