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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묵상]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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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빵 가게에서 노릇노릇 구워지는 빵을 보면, 납작하고 둥그런 것이 광야의 돌을 닮았습니다. 예수님이 광야에서 40일 단식하실 때 사탄이 빵으로 유혹했을 법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사람이 오래 굶고 나면 눈앞의 것이 빵인지 돌인지 헷갈릴 터입니다. 또한 예수님이 공생애 동안, 당신 말씀을 들으려고 모여든 군중을 먹이셨다는 빵도 이런 것일 듯합니다.

 

 

지금은 먹을거리가 많다 못해 식이 조절을 하지만 몇십 년 전만 해도 우리에게는 보릿고개가 있었습니다. 우리 부모와 조상들은 굶는 자식을 보며 파종할 씨앗으로 배고픔을 달랠지, 다음 농사를 기약할지 치열하게 고민하였을 것입니다. 옛 이스라엘에서도 상황은 비슷했던 모양입니다. 고픈 배를 부여잡고 씨를 뿌린 이들이 수확하여 기뻐하는 모습이 시편 126장 5~6절에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눈물로 씨 뿌리던 이들 환호하며 거두리라. 뿌릴 씨 들고 울며 가던 이 곡식 단 들고 환호하며 돌아오리라.” 옛 이스라엘에서도 가난한 이들은 보리 빵, 부유한 이들은 밀 빵을 먹었다고 하니 ‘꽁보리밥’은 우리에게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열왕기 하권 7장 16절에 따르면, 구약 시대 밀 가격은 보리의 두 배였습니다. 요한 6장 9절에서 예수님이 오병이어의 표징을 일으키실 때 한 어린아이가 마중물처럼 내어놓은 빵도 보리 빵입니다.

 

 

요한 6장 4절에 따르면, 예수님이 표징을 일으키신 때는 파스카 즈음입니다. 곧 보리를 수확하던 때입니다. 사실 파스카 축제는 맏배의 재앙에서 백성이 구원받은 기적을 기념하지만, 농사와 관련된 명절이기도 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이집트 탈출을 직접 경험한 세대는 주님의 은혜를 피부로 느낄 수 있기에 주님의 계명도 상대적으로 쉽게 지킬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후손들은 주님의 은혜를 머리로만 알고 체감하지는 못하여 잘못된 길로 빠지기 쉽습니다.

 

 

이런 탈선을 방지하려고 오경에서는 백성이 자자손손 이집트 탈출의 구원을 기억할 수 있도록 파스카를 비롯한 명절들을 주님의 현존 앞에서 지키도록 규정하였습니다. 다만 당시는 농경 사회였습니다. 하느님의 은혜를 되새기는 일도 중요하지만 농사를 팽개치고 주님 현존을 찾아가기는 어렵겠지요. 이에 성경에서는 주요 명절들을 농사 절기와 맞물리게 제정하였습니다. 탈출기 23장에도 그런 명절이 무교절, 수확절, 추수절이라는 농경 용어로 등장합니다.

 

 

무교절은 누룩 없는 빵을 먹는 축제이므로 파스카를 가리키고요, 수확절은 밀을 수확하는 주간절, 추수절은 포도와 올리브 등을 거둬들이는 초막절을 가리킵니다. 이 가운데 무교절, 곧 파스카 즈음에는 보리 수확을 시작하였습니다.

 

 

이렇듯 이스라엘의 명절은 농사 절기와 맞물리므로 기후와도 밀접하게 관계됩니다. 마르코 복음 6장 39절도 주님께서 기적을 일으키신 때가 파스카 즈음임을 추측하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명령하시어, 모두 푸른 풀밭에 ··· 자리 잡게 하셨다.” 이스라엘은 건기와 우기가 뚜렷이 구분되는 나라이므로 풀밭이 푸른 시기는 늦가을부터 늦봄까지의 우기뿐입니다.

 

 

파스카를 지내는 봄에 늦은 비(신명 11,14)가 내리고 나면 건기로 접어들며, 그때부터는 온 들판이 누렇게 뜹니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의 이 기적은 천지가 비를 맞아 생기를 되찾은 봄에 일어났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 기적을 기념하는 성전도 갈릴래아 바닷가에 자리했습니다. 예부터 ‘일곱 샘’이 있던 장소라 하여 그리스어로 ‘헵타페곤’인데, 지금은 발음이 와전되어 ‘타브가’라 합니다. 이곳 성전의 제대 아래 검은 돌이 예수님께서 빵을 들고 감사드리신 장소라고 합니다. 제대 앞에는 비잔틴 성당의 유적인 사병이어 모자이크도 있습니다. 다만 오병이 아니라 사병인 건, 생명의 빵이신 예수님이 한자리를 차지하신다는 상징성을 살린 까닭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오병이어로 군중을 먹이실 수 있었을까요? 저는 이 일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인 기적이라고 풀이하고 싶습니다. 사실 당시 예수님께 오병이어를 내어놓은 아이 말고도 군중에게는 비상식량이 조금씩은 있었을 것입니다. 그때는 교통이 발달하지도, 식당 등의 시설이 흔하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선뜻 나누기는 쉽지 않았겠지요. 내 식량을 타인에게 주었다간 언제 굶게 될지 모르는 까닭입니다. 

 

 

하지만 한 아이가 내어놓은 빵을 예수님께서 나누기 시작하시자 덩달아 제 것을 꺼내다 보니 모두가 먹고도 남게 되지 않았을까요? 그렇게 먹고 남은 조각만 열두 광주리가 가득 찼다고 하니 이는 분명 빵이 많아진 기적입니다. 말하자면 오병이어의 기적은, ‘기쁨도 나누면 두 배가 된다’는 우리 속담처럼 나눔 끝에 풍성하게 돌려받은 기적이 아닐까 싶습니다.

 

 

 

 

글 _ 김명숙 소피아(광주가톨릭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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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25-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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