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을 공부하다 보면 위대한 신학자와 영성가를 만나고, 그분들의 예언자적 통찰에 감탄하게 되며, 신앙이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신학 공부가 신앙에 도움이 되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신학 공부로 인해 교만에 빠져, 신학을 공부하지 않은 일반 신자들의 신앙을 하찮게 여길 위험이 있다.
신학이 자동으로 신앙을 성장시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살면서 겪는 경험이 양분되어 열매를 맺기 마련이다. 나이가 들수록 지혜가 쌓이며 신앙의 깊이를 더하게 된다. 그래서 신학을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예수님의 다음 말씀을 묵상하도록 권고한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마태 11,25)
지혜롭고 슬기로운 이들의 가장 큰 약점은 자기들이 갖고 있는 지혜와 지식에만 의존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자기들만이 옳다고 여기고 타인의 말이나 생각을 경시하게 된다. 당연히 하느님 아버지 뜻에 모든 것을 맡겨드리기 힘들다. 그와는 반대로 철부지 어린이 같은 사람은 순수한 마음으로 아버지께 모든 것을 맡길 수 있기에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알고 있다.
사제로서 많은 신자를 상대하면서 시간이 지날수록 확신하게 되는 것은 가장 깊은 신앙을 갖고 계신 분들은 유명한 신학자나 설교가보다 오히려 시골에서 평범하게 신앙생활을 하며 묵묵히 살아가는 할머니·할아버지라는 것이다.
살면서 만난 사람 중 가장 단단한 신앙을 갖고 계신 분들은 병중에 계속 묵주알을 굴리며 기도하시는 한 수녀님의 어머니, 저 먼 시골에서 성소 주일에 신학생인 필자를 만나기 위해 지팡이를 짚고 버스를 수차례 갈아타고 높은 신학교 언덕을 올라오며 보는 사람마다 “우리 바우루 어딨어?”하신 집안 어르신이시다. 그분들은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겨드릴 수 있는 지혜를 터득한 분들이다. 그렇기에 예수님처럼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며, 아버지 뜻이 이루어짐에 감사할 수 있는 기쁨을 맛볼 수 있었을 것이다.
주님께서는 가장 보잘것없는 이, 철부지들에게 당신 얼굴을 볼 수 있는 기회를 주신다. 물론 직접 눈으로 주님을 뵙는 것은 아니겠지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주님을 뵙고 그분의 신비 안으로 깊이 들어간 분들이 계시다. 그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하느님의 모습을 내비친다. 그들에게 비치는 하느님은 소박하고 가난한 분, 숨김이나 거짓이 없고 순수한 분, 있는 그대로의 당신 마음을 드러내는 분, 눈치 보거나 주저함이 없고 물 흐르듯 하는 분이시다.
그분들의 삶에 인생의 진리, 하느님 진리가 담겨 있다. 우리가 신앙을 사는 이유는 하느님을 닮기 위해서다. 겉으로 고상하고 성스러운 척하는 사람이 아닌, 진실함이 배어 나오는 사람, 진정한 인간미가 넘치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다. 우리가 본당에서 만나는 평범한 신자분들이 바로 그러한 사람들이다. 그들에게서 하느님의 얼굴을 알아볼 수 있는 눈이 필요하다.
이제 주님께 청할 수 있으면 좋겠다. 철부지 어린애들처럼 주님께 맡겨드릴 수 있는 마음의 자유를, 가림 없이 자기를 드러낼 수 있는 용기를, 남을 손가락질하고 판단하기 전에 그 사람의 처지를 헤아려볼 수 있는 지혜를, 도움이 필요한 이에게 손을 내밀어 줄 수 있는 결단력을, 그리고 보다 나은 내일을 위해 필요한 무언가를 직언할 수 있는 책임감을 주시기를.
한민택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