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7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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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매순간 죽음과 함께 끝을 향해 가는 존재

[박병준 신부의 철학상담] 27.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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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주님, 저마다 고유한 죽음을 주소서.” 릴케(1875~1926)의 이 고백처럼 인간 삶에서 죽음만큼 고유한 사건은 없을 것이다.

죽음은 우리 모두에게 그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는 매우 고유한 종말의 사건이다. 죽음은 인류가 생긴 이래로 종교의 문제이자 철학의 문제였다. 죽음은 영원한 단절이자 종말이며, 모든 것을 허무로 돌리는 짙은 어둠이자 무거운 침묵이다. 인간은 이 불가피한 죽음 앞에서 근본적으로 실존적 불안을 느끼며, 또한 죽음을 이기는 희망을 꿈꾼다.

죽음에 대한 이해는 자연과학에서 주장하는 ‘생명의 단절로서의 죽음’부터 종교에서 주장하는 ‘영원불멸로서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유물론자인 포이에르바하(1804~1872)는 이생에서 건강하게 살다가 수명을 다하고 노년에 삶을 마감하는 ‘자연적 죽음’의 의미를 부각하면서 유일무이한 현세 삶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의미 있는 일을 위해 적극적으로 자기 삶을 살 것을 촉구한다.

그러나 오로지 현세적 삶과의 관련성에서만 죽음의 유의미성을 끌어내는 자연적 죽음으로는 그것이 자연과학적 세계관과 현대성을 표현하는 대표적 표상임에도 불구하고, 나이와 상관없이 현실에서 맞닥뜨리는 한계상황으로서의 죽음을 이해하는 데 한계가 있다. 노년기의 자연적 죽음이 이상적인 것이라 하더라도, 죽어가는 사람에게는 다가오는 낯선 죽음과의 화해란 사실상 어려운 일이다.

실존철학자 야스퍼스(1883~1969)는 인간의 근본상황이자 한계상황으로서의 죽음에는 인간 실존을 이해하고 규명하는, 생물학적 종말 그 이상의 중요한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죽음은 인간이 절대로 넘어설 수도, 범접할 수도 없는 것으로서 그 자체로 경험 및 이해 불가한 것이다.

죽음은 표상할 수도, 사유할 수도 없는 그 무엇으로서 ‘절대적 무지’이자 ‘절대적 침묵’이다. 죽음이 의미 있게 다가오는 순간은 생물학적인 죽음의 순간이 아니라 실존의 가능한 심연을 일깨우는 한계상황으로서의 죽음과 실존적으로 맞닥뜨리는 순간이다. 이러한 태도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스토아적 태연함도 아니며, 피안(彼岸)의 삶의 환상으로 죽음의 허무를 이겨내는 세계 부정도 아니다. 오히려 자기 죽음을 의식하며 자기 존재가 무화되는 고통의 무게를 기꺼이 짊어지고 견디는 태도에서 참된 죽음의 의미가 드러난다.

하이데거(1889~1976)는 인간 현존재를 ‘죽음을 향한 존재’로 규정한다. 죽음은 모든 것이 거기서 무화되는 ‘존재 부재’를 의미하며, 인간은 죽음을 향해 선구적으로 다가갈 때 비로소 현존재 전체성 안에서 자기 존재 가능과 관련하여 의미 있는 투신을 하게 된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자기 존재 가능을 염려하며, 그 염려의 배경에는 죽음이 놓여있다. 인간이 최종적이며 종말적으로 떠맡는 것은 바로 죽음의 가능성이다. 이 죽음의 가능성 앞에 설 때 인간은 비로소 본래의 자기 자신으로 존재할 수 있게 된다.

인간은 매 순간 죽음과 함께 끝에 와있는 것이 아니라 끝을 향해 가는 존재로서 태어남과 동시에 죽음에 내몰려 있다. 죽음은 결코 삶의 종말이거나 삶의 단절을 의미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 한계를 통해 삶을 전체적이며 총체적으로 바라보게 하는, 즉 삶을 보다 의미 충만하게 만들어주는 삶의 기본 요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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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5-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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