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7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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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장, 절망이 아니라 하느님 안에서 열리는 새로운 시작

[김용은 수녀의 오늘도, 안녕하세요?] 120. 막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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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 곳곳에서 막장 드라마에서나 펼쳐질 법한 범죄들이 발생하기도 한다. 삶의 끝자락, 파국으로 여겨지는 막장은 우리 현실의 단면이기도 하다. 2023년 발생한 경기 성남시 분당구 서현역 묻지마 범죄 현장에서 수사관들이 현장 감식을 하고 있다. 뉴시스


우리는 종종 드라마를 보며 말한다. “이건 막장이야.” 출생의 비밀, 금지된 사랑, 끝없는 복수?. 자극적인 설정에 개연성은 부족하다. ‘욕하면서도 본다’는 말처럼 막장 드라마는 오히려 높은 시청률을 자랑하곤 한다.

그런데 매일 쏟아지는 뉴스를 보다 보면, 현실이 드라마보다 더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때도 있다. 묻지마 범죄·층간소음 살인·가정폭력·아동학대에 심지어 국회 청문회조차 ‘막장’ 논란의 무대가 되곤 한다. 이런 뉴스에도 우리는 여전히 본다. 그러고 보면 어쩌면 ‘막장’은 어느새 우리 삶의 또 다른 이름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사실 ‘막장’이라는 말은 가볍게 쓰기엔 그 말의 뿌리가 무겁다. 본래 ‘막장’은 광산에서 가장 깊은 갱도의 끝자락, 더는 내려갈 수 없는 끝자리다. 햇빛 한 줄기 들지 않는 그 어둠 속 현장은 생존의 심장부이기도 했다. 막장은 천박함이 아니라 존엄과 투혼의 상징이었다.

그럼에도 오늘날 ‘막장’은 비도덕적이고 자극적인 상황을 지칭하는 부정적 수사로 굳어졌다. ‘막장 드라마’ ‘막장 정치’ ‘막장 사회’처럼 상식과 도덕이 무너진 파국의 코드로 쓰인다. ‘막[末]’이라는 말은 내려갈 곳 없는 소진과 절망의 상태를 말한다. 막장·막판·막일·막무가내·막바지?. 앞이 보이지 않는, 더 이상 갈 수 없는 지점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시작을 뜻하는 고유어 ‘막’도 있다. ‘막’은 끝을 의미하는 절망의 상징이 되기도 하지만, 동시에 방금·갓·지금 바로를 뜻하며 행동의 시작이나 순간성을 강조하기도 한다. 예컨대 ‘막 도착하다’ ‘막 시작하다’ ‘막 지은 밥’ 같은 표현이 그렇다. ‘막걸리’라는 말도 지금 막 거른 술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어, 새로운 발효의 기쁨이 시작되는 순간과 맞닿아 있다. 같은 음절 ‘막’이지만, 하나는 끝을, 다른 하나는 시작을 가리킨다. 끝과 시작, 절망과 희망이 이 짧은 말 안에 함께 담겨 있다.

‘막노동’은 천대받는 육체노동처럼 여겨지지만, 실상은 가장 밑바닥에서 사회를 지탱하는 정직한 일이다. ‘막말’은 품격 없고 무례하다는 비난을 받지만, 때로는 그 거침없는 솔직함이 가식 없는 진실을 드러내기도 한다. ‘막’은 규범의 테두리 바깥에서 억눌린 감정과 현실을 여과 없이 내뱉는 언어다. 어쩌면 그것은 더 이상 지킬 것이 없는 벼랑 끝에서 터져 나오는 절규일지도 모른다.

‘막장’도 마찬가지다. 삶의 끝자락. 파국과 절망의 공간이지만, 그 끝에서 역설적으로 진짜 인간의 얼굴이 드러나기도 한다. 막장 드라마가 비현실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오히려 현실에서 억눌렸던 욕망과 상처, 무너진 관계를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막’은 문명화된 언어의 바깥에서 우리가 외면해온 진실을 들춰낸다. 통제와 품격이라는 이름 아래 가려졌던 것들이 ‘막’이라는 틈 사이로 흘러나온다. 거칠지만 정직하고, 불편하지만 회피할 수 없는 언어. 그래서 ‘막’은 혐오가 아니라, 진실을 드러내는 또 하나의 방식이기도 하다.

‘막’은 무질서일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질서 이전의 상태, 창조가 시작되기 직전의 혼돈이기도 하다. 성경에서도 창조는 바로 그 혼돈에서 출발한다. “땅은 아직 꼴을 갖추지 못하고 비어 있었는데, 어둠이 심연을 덮고”(창세 1,2) 있지만, “하느님의 영”이 감돌고 있었다. 하느님은 “빛이 있으라” 하시며 무질서 속에 새 질서를 여셨다.

무너짐의 끝에서야 진실이 고개를 들고, 더는 갈 곳이 없을 때 비로소 빛이 새어 들어온다. 우리는 때때로 바로 그 ‘막’에서 진짜 나 자신과 마주하게 된다. 그리고 그 솔직한 얼굴 앞에서 세상과의 관계도 다시 맺을 수 있다. 그러니 ‘막’은 끝이 아니라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자리다. 희망은 어쩌면 바로 그 막막함 속에서 움트는 법이다. ‘막장’, 더 이상 내려갈 데 없는 끝이지만, 동시에 하늘을 향한 비상구일 수 있다.

우리는 모두 자기 삶의 무대 위에 서 있다. ‘지금’이라는 막과 ‘끝’의 막, 그 교차로에 머무르며 이 순간에도 우리의 ‘막’은 이어지고 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광산의 ‘막장’이라 할지라도, 그 끝은 하느님 안에서 다시 시작되는 ‘막’이다.


<영성이 묻는 안부>

인생에는 ‘막’이 있습니다. 무대의 막이 오르면 이야기가 시작되고, 언젠가 그 막은 다시 내려옵니다. 지금 이 순간, 우리는 시작과 끝이 맞닿은 경계에 서 있습니다. 신앙도 바로 그 지점에 머뭅니다. 세상에서는 퇴장이지만, 하느님 안에서는 입장이 되는 자리. 순교자들은 그 막을 지나 생명의 시작으로 나아간 이들입니다. 막이 내렸다고 모든 것이 끝나는 건 아닙니다. 그들의 피는 땅에 스며든 듯하지만, 교회의 씨앗이 되어 우리의 ‘막’ 위에서 다시 피어납니다.

삶은 늘 이 무대 위에서 펼쳐지고, 지금 막 시작된 이 순간은 언젠가 마지막 막이 내리는 순간과 이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그 끝은 절망이 아니라, 하느님 안에서 열리는 새로운 시작입니다. “순교자의 피는 그리스도인의 씨앗이다.”(터툴리아누스) 죽음을 넘어 생명을 증언한 이들의 ‘막’은 곧 하늘나라의 첫 막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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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5-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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