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의 가르침, 계명, 율법은 그분께서 주시는 가장 귀한 선물입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느님의 뜻에 맞을까, 어떻게 해야 구원받을까,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까 하는 질문에 대한 답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선물이 주어지는 순간, 역설적인 부담이 함께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구원과 생명의 책임이 우리에게로 넘어오기 때문입니다. 그 가르침대로 살고 계명을 따를 것인지, 따르지 않을 것인지가 이제 우리에게 달렸습니다.
그 가르침이 쉽고, 직접적이고, 오해의 여지가 없을수록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이 지켜야 할 율법의 가르침을 주신 후에 나오는 신명기의 말씀은 축복이면서 동시에 저주 또는 경고의 말씀입니다. “그 말씀은 이제 너희의 입과 마음에 쉽게, 가까이 주어졌으니, 그것을 실천할지 말지는 온전히 너희에게 달렸다”(신명 30, 14 참조)는 것입니다. 어쩌면 이것은 다음과 같은 하느님의 반문입니다. “자, 여기 있다. 이제 너는 어쩔래?”
오늘 복음 말씀은 두 부분으로 나뉩니다. 이 두 부분은 공통으로 다음과 같은 형식을 갖고 있습니다. 1. 숨겨진 의도를 가진 율법 교사의 질문, 2. 예수님의 응답: (비유)+반문, 3. 율법 교사의 대답, 4. 예수님의 긍정적 대답과 명령(파견).
첫 번째 질문은 정답이 나와 있는 질문입니다. 율법 교사는 답이 궁금해서가 아니라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그 질문을 합니다. 예수님은 반문하십니다. 그 반문에는 “너는 율법을 모르느냐? 왜 모두가 아는 것을 묻느냐?”라는 반격의 의도가 깔려 있습니다. 계명에 대한 율법 교사의 대답과 “옳게 대답하였다. 그렇게 하여라. 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잘 알고 있네? 그럼 묻지 말고 그렇게 실천하여라’)라는 예수님의 답으로 반격은 완성됩니다. 깔끔한 판정승입니다.
하지만 율법 교사는 두 번째 질문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자기가 정당함을, 첫 번째 질문이 의미가 있음을 드러내기 위해서,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라고 묻습니다. ‘그러면’이라는 접속사는 뭔가 토를 달 때 사용합니다. 하느님의 가르침에 토를 다는 것입니다. 아직 그것을 실천하기에는 그 가르침이 충분히 쉽거나 명확하지 못하다는 응답입니다. 사실 이것이 율법 학자들의 일이었습니다.
이에 답하시기 위해 예수님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사마리아인은 율법을 몰랐지만 강도를 만난 이에게 가엾은 마음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이익이나 사회적 통념, 시와 때를 가리지 않고 그저 그 마음을 따랐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선한 이방인을 사제나 레위인과 비교함으로써 윤리적 딜레마나 긴장을 일으키려고 하신 것이 아니라, 이웃을 사랑하라는 율법이 사람이라면 누구나 쉽게 이해하고 실천할 수 있는 일임을 보여주려고 하신 것입니다.
강도를 만난 이에게 “이웃이 되어 준” 사람이 누구냐는 예수님의 질문은 이웃이기에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함으로써 이웃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라는 질문에서 가장 기본으로 삼을 수 있는 기준은 유대인이냐, 이방인이냐 하는 구분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애초에 이 사랑의 계명은 이웃을 구분하는 것이 아님을 말씀하셨고, 율법 교사는 그의 답에서 자비를 베푼 이를 ‘사마리아인’이 아니라 ‘사람’이라고 칭함으로써 예수님의 의도에 전적으로 순종합니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하시는 예수님의 두 번째 파견 말씀은 첫 번째의 것보다 부드럽게 느껴지며, 마치 제자를 파견하시는 것 같습니다.
주님이 주신 사랑의 계명에 부담을 갖고 결단을 주저하는 우리에게 주님께서는 아마 이렇게 이야기하실 듯합니다. “그리스도인이 왜 이렇게 혓바닥이 길어? ‘예’면 ‘예’, ‘아니’면 ‘아니’라고만 해라. 그 이상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영화 <타짜>, 마태 5,37 참조) 주님 사랑의 계명은 강요가 아니라 모범으로 주어졌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의무감이 아니라 마음의 감동과 응답으로 이를 실천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모두의 마음에 주님의 사랑만이 가득하기를 성령께 기도합니다.
글 _ 변승식 요한 보스코 신부(의정부교구 안식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