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땅바닥에서 잠든 노숙인을 위해 음식과 함께 1유로를 건네는 카를로 아쿠티스. AI 생성 이미지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 큰 사랑의 계명에 대해 율법 교사는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라고 예수님께 질문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로 답하십니다. 그리고 그 핵심에 자리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반문입니다.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루카 10,25-37 참조) 그렇습니다. 우리의 성찰은 ‘누가 나의 이웃인가’가 아니라, ‘내가 어떻게 이웃이 되어 줄 것인가’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레오 14세 교황님께서는 5월 28일 일반알현 교리교육에서 이 비유를 들어, 우리가 누구인지는 우리 삶에서 이루어지는 여러 만남을 통해 드러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결정적 순간에는 종교인이라는 외양조차 아무 의미가 없으며, 우리가 예배를 드린다고 자비로운 마음이 저절로 생기지 않는다고 강조하셨습니다.
하느님 백성으로 살아가고 나아가 주님을 섬기는 사제의 길을 걷는데도, 현실의 고통과 어려움에 함께 아파하고 함께 상처받으려 하지 않는다면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 나오는 레위인이나 사제와 다를 바 없는 것입니다. 교황님께서는 단호히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신앙인이 되기에 앞서 먼저 인간이 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복자 카를로 아쿠티스는 진정한 이웃됨의 모범입니다. 나눔은 그에게 참으로 선택이 아닌 의무였습니다. 가난한 이들을 향한 사랑은 아주 어릴 적부터 자연스럽게 드러났습니다. 보모 베아타는 어린 카를로가 거리에서 노숙인을 만나면 스스럼없이 다가가 안부를 묻고 위로의 말을 건넸다고 회상합니다.
그는 레고 블록을 좋아했지만, 장난감을 살 여유가 없는 친구에게 기꺼이 자기 블록을 주었습니다. 아시시에서 강아지를 산책시키다가 공원에서 노숙하는 사람들을 보고는, 외할머니에게 매일 저녁 가난한 이들을 위한 음식을 준비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특히 차가운 땅바닥에서 잠든 이들을 본 뒤로는 저녁마다 음식과 함께 1유로를 그들 곁에 놓아두곤 했습니다. 잠에서 깼을 때 바로 발견할 수 있게 말입니다. 용돈이 모이면 노숙인들을 위한 옷이나 침낭을 사서 선물하기도 했습니다.
밀라노의 카푸친 작은 형제회가 운영하는 성 프란치스코 자선소를 알게 되면서 카를로는 애덕과 사도직의 길에서 더 넓은 세계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는 다섯 살 때 처음 만났던 카푸친회의 줄리오 사볼디 신부와 종종 교류했고, 어려운 아이들을 돕기 위해 모은 저금통을 통째로 자선소에 가져다주었습니다. 사볼디 신부는 다른 이들의 고통과 가난에 이처럼 깊이 공감하는 아이를 본 적이 없었다고 회고합니다.
카를로는 어른이 되면, 집 없이 떠도는 이들을 위한 활동 단체를 만들고 싶어 했고 특히 개인 공간과 사물함이 있는 쉼터를 짓는 꿈을 꾸었습니다. 성 프란치스코와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가 보여준 사랑의 실천은 늘 그를 이끌어주는 영감의 원천이었습니다.
“우리는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웃을 위해서 창조되었습니다.” 카를로의 이 말은 구체적인 실천으로 증명되었습니다. 그의 선교는 온라인 공간을 향했지만, 그의 자선은 언제나 두 손과 두 발을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그가 존경한 마더 데레사의 생애가 그러했듯, 카를로의 삶도 침묵과 기도, 믿음과 사랑, 봉사와 평화로 엮인 단순한 길이었습니다.
우리도 그처럼 단순한 길을 걸어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저 또한 사랑의 선교 수사회 ‘마더 데레사의 집’을 찾을 때마다 ‘가난한 이들 안에 숨어 계신 그리스도를 발견하게 해달라’는 봉사자의 기도를 바치면서 작고 단순한 길을 만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다른 어느 곳도 아닌 가장 가난한 이들 안에 현존하고 계시며, 그들을 통해 저를 구원의 길로 이끌어주신다는 사실을 매번 다시 깨닫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