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말의 과잉 속에서 침묵을 잃어가고 있다. 말에도 쉼표가 필요하다. 말이 넘치는 시대일수록 침묵의 자리를 회복해야 한다. 젊은이들이 피정에서 침묵하며 자신을 돌아보고 있다. 가톨릭평화신문 DB
“사람들은 말하네, 말하지 않은 채. 사람들은 듣고 있네, 듣지 않은 채.”
사이먼 앤 가펑클의 노래 ‘The Sound of Silence’의 첫 구절은 지금 우리 시대를 정확히 말해주는 듯하다. 말이 넘쳐나는 세상, 우리는 정말 대화하고 있을까? 각자 자기 말만 쏟아내는 말 잔치 속에서 우리는 ‘말하지 않은 채 말하고, 듣지 않은 채 듣는’ 시대를 살고 있다.
더 많이 말하고 더 많이 듣지만, 정작 자기 생각을 나누는 일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종종 어디선가 들은 정보를 복사해 주고 받는다. 글뿐 아니라 말도 ‘복붙’ 되는 시대, 넘쳐나는 정보에 떠밀려 우리는 하루에도 수천 개의 말과 이미지를 접한다. 생각하기보다 반응하고, 대화하기보다 구경하며 방관한다. 말은 쏟아지는데, 정작 대화는 사라지고 있다. 듣고 싶지 않아도 말이 들려오고, 말하지 않아도 말에 둘러싸인다. 그렇게 우리는 말하지 않은 채 말하고, 듣지 않은 채 듣는다.
노래 제목은 ‘침묵의 소리’(The Sound of Silence)다. 정말 침묵에도 소리가 있을까? 우리는 그 침묵의 소리를 들어본 적 있을까? 어쩌면 그 소리는 말이 넘쳐나는 이 세상에서 오히려 더 선명하게 들려온다. 말이 벽이 되어 마음에 닿지 못할 때, 고요 속에서 끓어오르는 울림.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는 마음의 울부짖음. 대화는 종종 말보다 침묵에서 시작된다. 그러나 우리는 말의 과잉 속에서 오히려 침묵을 잃어가고 있다.
말은 때때로 맥락에서 떨어진 조각이 되어 길을 잃는다. 옳고 그름, 좋고 싫음, 정상과 비정상 같은 이분법적 언어는 누군가를 판단하고 단정 짓는 도구가 되기도 한다. 뉴스 속 막말, 거친 언사, 댓글 창의 익명 비난은 단지 ‘특정인’의 문제가 아닐 것이다. 그 안에는 우리 모두의 말버릇과 감정표현 방식이 스며있기도 하다.
최근 한 설문에 따르면, 직장인 10명 중 6명이 근무 중 인격 모독성 발언을 경험했다고 한다. 온라인도 예외는 아니다. 익명성과 즉각성, 감정을 배설하게 만드는 구조, 자극을 보상하는 알고리즘은 말의 폭력을 부추긴다. 막말 영상, 조롱 댓글, 악의적 자막과 편집은 놀이처럼 소비되고 밈처럼 퍼져나간다. 말은 점점 가벼워지고, 비난은 너무 쉽게 정당화된다.
“말은 창문이거나 벽이 될 수 있다.” 루스 베버마이어의 시 ‘Words Are Windows(or They''re Walls)’ 속 이 문장은 우리에게 묻는다. 지금 내가 하는 말은 누군가에게 빛을 들이는 창인가, 아니면 고립시키는 벽인가? 말 한마디에 누군가는 교도소보다 더 무서운 감옥에 갇히고, 어떤 말은 사람의 존재 자체를 지워버린다. 어떤 말은 숨통을 틔우고, 어떤 말은 벽돌처럼 쌓여 마음을 막는다.
우리는 지금 ‘말에 예민한 시대’를 살고 있다. 정치인의 한마디, 연예인의 댓글 하나가 순식간에 논란이 되고, 그 말 한 줄이 누군가의 삶 전체를 흔든다. 말의 파장은 점점 커지고, 무게는 점점 무거워진다. 그럼에도 우리는 매일 수많은 말을 쏟아낸다. 설득하고, 논쟁하고, 설명하면서도 여전히 대화보다 복사한 정보로 말의 잔치를 이어간다. 하지만 과연 나의 고유한 목소리는 얼마나 담겨 있을까? 복사된 정보들 사이에서 우리는 진짜 대화를 잃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말이란 ‘설(說)’이 ‘열(悅)’해야 한다고 했다. 단지 옳은 것만 말하는 데 그치지 않고, 듣는 이의 마음을 기쁘게 하고, 고요히 밝히는 말이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말에도 쉼표가 필요하다. 질식되어가는 침묵의 언어에 숨을 불어넣는, 쉼표 같은 말 말이다.
말이 넘치는 시대일수록 우리는 침묵의 자리를 회복해야겠다. 침묵은 빠르게 흘러가는 시간을 붙잡고, 감정에 휩쓸리기 전에 나 자신을 돌아보게 한다. 침묵은 천천히 살핀다. 그래서 더 쉽게 감동하고, 작고 평범한 것에서 행복을 발견한다. 말이 닿지 않을 때, 말로 다 담을 수 없을 때, 조용히 찾아오는 고요. 그 고요 속에서 들려오는 침묵의 소리는 나만의 유일한 언어이며 관조이자 기도가 된다.
<영성이 묻는 안부>
가끔 ‘말’에 대해 성찰해봅니다. 내가 하는 말이 누군가를 조종하거나 강요하고, 더 나아가 폭력의 도구가 되는 건 아닌지. 인스턴트 정보 속에 파묻혀 정작 내 이야기를 잃어가고 있는 건 아닌지요. 연예인과 정치인 말에는 귀를 기울이면서 이웃과 나, 우리 삶을 담은 이야기는 어디로 사라졌을까요? 가벼운 가십에 빠질수록 말은 많아지고, 그럴수록 침묵의 여백은 더욱 간절해집니다. 깊은 생각에 잠겨 글을 쓰거나 책을 읽은 뒤 사람을 만나면 말이 잘 나오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수녀님, 무슨 일 있으세요?”라는 질문에 그제야 ‘내가 아직 침묵 속에 머물고 있었구나’ 하고 깨닫습니다.
조용하다고 해서 마음이 힘든 건 아닌데, 말이 없으면 불편해하는 시선이 종종 마음에 걸립니다. 반대로 분주하게 통화를 하거나 정보를 찾아다니다 사람을 만나면, 나도 모르게 말이 많아집니다. 깊은 내면에 닿지 못했기 때문이겠지요. 정말 그렇습니다. 사람은 깊이 생각할수록 말수가 줄어드는 것 같습니다. 깊이 내려간 생각이 다시 말로 올라오려면 시간이 필요하고, 그 무게만큼 조용히 머물게 되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