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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존적 수치심, 진정한 자기 존재가 되는 시금석

[박병준 신부의 철학상담] 31. 수치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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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치심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본질적인 ‘자기 의식적 감정’이다. 맹자(孟子, 기원전 372~289년경)의 수오지심(羞惡之心)처럼 자신이 부족한 존재임을 일깨워주는 건강하고 건설적인 자기반성과 수양의 동력으로 작용하는 반면, ‘사람들의 나쁜 평판에 대한 두려움’이 과도하게 발생할 때 심각한 병리적 증상을 수반함으로써 극도의 대인기피증이나 우울증으로 정신건강을 해치는 이중적인 성격을 지닌다.

수치심의 기원과 관련해 플라톤(Platon, 기원전 428/7~348/7년경)은 「향연」에서 아리스토 파네스를 통해 ‘불완전함에서 오는 고통스러운 감정’으로 표현한다. 둘이 결합하여 완전한 구형의 모습을 갖춘 인간이 전지전능한 신에 대항하다 강제로 둘로 나눠진 이후 완전할 때의 자신을 떠올리며 느끼는 원초적 감정이 바로 수치심이다. 인간은 스스로 완전해야 한다는 원초적 갈망을 내재하고 있으며, 자신의 부족함을 인식할 때마다 이 근원적 수치심을 드러내곤 한다.

?창세기?의 아담과 하와 이야기는 수치심을 성적인 것과 관련시킨다. 에덴 동산에서 알몸이었음에도 부끄러워하지 않던 아담과 하와가 뱀의 유혹에 빠져 선악과를 따 먹은 뒤 수치심을 느낀다. 그러나 이때 수치심은 은밀한 신체 부위의 노출에서 오는 단순한 부끄러운 감정의 의미를 넘어 근본적으로 자기와 세계의 경계를 인식하고, 무엇보다 금령과 관련하여 신, 즉 타자의 시선을 의식하는 시작이자 거기서 발현되는 원초적 감정의 의미를 함축한다.

타자의 시선은 나에 대한 타자의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현전이자 시선 끝에 와 닿는 모두를 대상화하는 강력한 힘으로 작용하기에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부단히 타자의 시선을 의식하며 살 수밖에 없다. 이와 관련해 사르트르(Jean-Paul Sartre, 1905~1980)는 수치심을 자기 자신을 의식하는 ‘대자적 존재(être-pour-soi)’인 내가 고정되고 종속된 ‘즉자적 존재(être-en-soi)’로 인식될 때, 즉 타인의 시선에 의해 자유로운 주체가 되지 못하고 타인에 의해 규정되고 객체화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근원적인 감정으로 본다.

이와 다르게 야스퍼스(Karl Jaspers, 1883~1969)는 실존론적으로 더 깊은 차원에서 긍정적인 의미의 ‘실존적 수치심’을 말한다. 실존적 수치심은 스스로 자기를 갉아먹는 부정적 의미의 ‘심리적 수치심’과 근본적으로 구별된다. 심리적 수치심이 우리가 주로 사회적 규범이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할 때 느끼는 부정적인 심리적 정서라면, 실존적 수치심은 근본적으로 자기 실존의 한계나 불완전함을 인식할 때 느끼는 원초적 감정이다. 이는 한 실존이 다른 실존 앞에서 거짓과 오해를 염려하며 무제약적인 본래적 자기를 보호하려는 태도에서 유발되는 일종의 ‘절대 의식’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수치심은 실존이 자기 한계를 인식하는 가운데 진정한 자기 존재가 되는 중요한 시금석으로 작용한다.

그렇기에 우리가 수치심을 갖는 진정한 이유는 타인을 의식해서이기보다는 진정한 자기로 있을 수 있게 하기 위함이다. 우리 사회는 언제부터인가 수치심을 상실한 듯하다. 타인의 시선조차 아랑곳하지 않으며, 또한 교묘하게 법망을 피하며 권력과 재물을 탐하는 몰염치한 자가 많다. 어느 때보다도 자기를 기만하지 않고 참된 자기로 있고자 하는 진정한 수치심이 우리에게 필요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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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5-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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