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한 집안의 다섯 식구가 서로 갈라져, 세 사람이 두 사람에게 ··· 두 사람이 세 사람에게 맞설 것이다.”(루카 12,52)라고 말씀하십니다. 언뜻 이해되지 않는 말씀입니다. 연대와 사랑으로 뭉쳐야 할 가족이 더 이상 가족이지 못하는 상태를 가리키는 듯하기 때문입니다. 오경에는 부모 공경과 이웃 사랑 율법도 나오는데,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실마리는 제1독서에서 찾을 수 있을 듯합니다. 기원전 7~6세기 유다 왕국에서 활동한 예레미야의 상황을 떠올리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의 고향은 아나톳입니다.(예레 1,1 참조)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5km가량 떨어진 옛 고을입니다. 아나톳은 광야에 인접해 있던 마을이라 이집트 탈출기를 떠올려주는 토양의 특징은 예레미야의 사상과 인격 형성에 영향을 주었을 터입니다. 그런데 예레미야서 11장 21절에 따르면 아나톳인들, 곧 예레미야의 고향 사람들이 그의 목숨을 노리며 죽이려 듭니다. 예레미야서 12장 6절에는 “네 형제들과 네 아버지 집안조차도 너를 배신하고 너에게 마구 소리를 지르는구나. 그러니 그들이 너에게 좋은 말을 한다 해도 그들을 믿지 마라”라는 주님의 말씀도 나옵니다.
가족과 고향 사람들이 예레미야를 박해한 이유로는 여러 가지를 들 수 있지만, 가장 중요한 요인은 시온 신학과 관계가 있어 보입니다. 시온 신학이란 다윗 계약에 근거한 것으로, 하느님께서 다윗에게 영원한 왕좌를 약속하셨으니(2사무 7,11ㄴ-16; 23,5; 시편 89,4-5 참조) 시온산 위의 성전과 다윗 왕조는 무너지지 않는다는 믿음을 기초로 합니다.
기원전 722년 아시리아가 북왕국을 무너뜨리고 남왕국도 호시탐탐 엿보았지만, 701년 히즈키야 임금 때 예루살렘 정복에는 실패합니다.(2열왕 19,20-35; 이사 37,21-36 참조) 이에 다윗 왕조와 시온은 안전하다는 신학이 힘을 얻게 되었고 이후 맹목적으로 발전한 듯합니다. 국제 정세가 악화되는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게 되어 백성이 예루살렘 성전을 난공불락으로 여겼음이 성경 여러 군데에서 확인됩니다.(예레 7,3-4.10 참조) 시나이산 계약에 따른 율법은 그 여파로 무시되기 시작합니다.
다윗 계약과 시나이산 계약은 성격이 다릅니다. 다윗 계약은 하느님의 은혜로 내려진 “영원한 계약”(2사무 23,5)이지만, 시나이산 계약은 여러 율법을 동반하여 그걸 지키지 않으면 약속의 땅에서 쫓겨나는 ‘조건 계약’입니다(레위 26,14-39; 신명 28,15-68 참조). 시간이 흐르면서 백성은 지키기 편한 다윗 계약으로 기울어 까다로운 시나이산 계약에 대해서는 크게 신경 쓰지 않은 듯합니다.(예레 7,9; 16,11 등 참조) 그 부작용으로 종교·도덕적 부패가 심화하자, 예레미야가 시나이산 계약 준수를 역설하며 이대로 지속되면 나라는 무너질 수밖에 없다는 신탁을 전달한 것입니다.(예레 11,1-14 등 참조)
문제는 예레미야 외의 대다수 예언자는 시온 신학에 의지해 태평성대를 예고하였다는 점입니다. “그분께서 그러실 리가 없다. 재앙이 우리에게 닥칠 리도 없고 우리가 칼이나 굶주림을 만날 리도 없다”(예레 5,12)는 등의 신탁을 전달하며(예레 6,14; 14,13 등 참조), 유다 왕국을 위협하는 바빌론도 주님께서 물리쳐 주시리라고 선포합니다.(예레 28,10-11 참조) 바빌론이 이미 1차 유배를 단행하여(기원전 597년) 여호야킨 임금을 비롯한 귀족을 끌고 갔는데도 말입니다.(예레 29,21-22; 에제 13,10 등 참조)
그렇다면 아나톳인들은 예레미야의 가족·친족이면서도 예레미야의 말에 반발한 일반 백성(예레 26,9.11 참조)과 똑같이 반응한 셈입니다. 더구나 예레미야는 상징 행위로 신탁을 효과적으로 전달하려고 혼인도 하지 않고 초상집·잔칫집 방문의 예의도 지키지 않았기에(예레 16,1-13 참조) 집안의 명예를 실추시킨다고 더욱 박해했을 터입니다.
하지만 예레미야의 독신은 하느님과 이스라엘의 계약(=혼인) 관계가 파탄에 직면했음을 상징하는 동시에 백성이 혼인해 얻은 자식을 죄다 잃게 될 것임을 예고하는 것입니다. 초상집·잔칫집에 들어가지 않는 행위는 이스라엘에서 생존자는 소수(망자를 모두 묻어줄 수 없을 정도)일 것임을, 이스라엘에서 기쁨 소리가 끊길 것임을 알리려던 것이었습니다.
예레미야는 가족의 반대를 무릅쓰고 주님의 명령대로 그의 목숨을 위협하는 신탁을 전달하여 분열을 가져온 것입니다. 백성이 회심하여 하느님과 맺은 약속, 곧 시나이산 계약을 지키지 않으면 가족 붕괴를 넘어 나라 멸망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듯합니다. 짧은 안목으로만 세상의 이치를 판단하면 오류를 범할 수 있으니 하나의 기준만 적용할 수 없음을 알려줍니다.
글 _ 김명숙 소피아(광주가톨릭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