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모두에게는 창조적 자아의 힘이 있다. 특히 부모는 아이들이 당장의 욕구보다 내재된 창조적 힘을 기를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OSV
어린아이가 커다란 막대사탕을 들고 환하게 웃으며 엄마에게 다가간다. 그런데 엄마는 단호하게 말한다. “지금은 먹지 않았으면 좋겠어.” 아이의 얼굴이 금세 구겨지고, 손에 쥔 사탕을 바라보는 눈빛엔 온 우주의 고민이 담긴 듯하다. 잠시 후 아이는 결심한 듯 사탕을 엄마 손에 올려놓는다. 그러자 엄마는 아이를 꼭 안으며 말한다. “고마워! 최고야!” 아이의 얼굴에는 세상을 다 얻은 듯한 기쁨이 번진다.
아이는 즉각적인 외적 보상을 포기하는 대신 엄마의 인정이라는 긍정적 보상을 얻어내며 자존감을 회복했다. 이것이 바로 창조적 자아의 힘이다.
정신의학자 알프레드 아들러는 “자아의 창조적 힘이 있으면 보상의 욕구도 해결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인간은 단순한 수동적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 의미를 창조하는 능동적 존재다. 하지만 현대 사회는 우리를 빠른 보상 시스템에 종속시켜 창조적 힘을 발휘하기도 전에 스스로를 포장하고 도피하게 만든다. 열등감을 극복하려다 찾게 되는 중독적인 보상은 결국 열등감을 덮는 위험한 유혹이다. 일시적 보상에 이끌리면서 진짜 나와 점점 멀어지고 있다.
우리는 지금 보상 중독의 시대를 살고 있다. 아침에 스마트폰 알람에 눈을 뜨는 순간부터 커피 한 잔, 음악, 유튜브, 온라인 쇼핑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이어지는 ‘외적 보상’에 반응한다. 하지만 그것이 내 선택인지 보상 시스템에 끌려다니는 것인지조차 깨닫지 못한 채 살아간다.
얼마 전 젊은이들에게 “나의 성장을 방해하는 가장 큰 유혹은 무엇인가?”라고 물었을 때, 그 누구도 스마트폰을 꼽지 않았다. 그들에게 스마트폰은 이미 유혹이 아니라, 없으면 안 되는 도구이자 환경이다. 우리는 도구를 사용하는 줄 알지만, 사실은 도구에 사용당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목적을 위한 수단이 어느새 목적 자체가 되어버려 자신도 모르는 사이 수많은 시간을 허무하게 흘려보내고 있다.
욕구를 인식하지 못하는 것만큼 위험한 일도 없다. 익숙해진 유혹은 ‘일상’이 되고, 자동화된 보상은 ‘보상’이라는 자각 없이 우리를 움직인다. 그럴수록 삶은 타인의 설계에 종속되고, 자기 해석과 의미 창조의 힘은 마비된다. 보상은 언제나 우리의 결핍을 겨냥한다. 열등감을 달래주겠다며 외적 보상이라는 당근을 흔들지만, 그 보상은 진짜 만족 대신 가짜 포만감만 남긴다. 무의식 속 열등감은 보상 욕구를 자극하고, 우리는 그 욕구에 끌려다니며 스스로 삶을 창조하기보다 빠른 보상 시스템 속에서 기계처럼 소비하는 삶을 살게 된다.
아들러의 말처럼 우리 인간은 본래 자아의 창조적 힘을 지니고 있는 걸까? 그렇다면 외부 환경에 휘둘려 즉각적 보상에 종속되지 않는 능력도 분명히 있는 것일까?
아이는 사탕이라는 즉각적이고 감각적인 보상을 포기했지만, 엄마의 사랑과 인정·소속감이라는 더 깊고 지속적인 만족을 선택했다. 욕구를 억누른 것이 아니라, 긍정적 보상으로 방향을 전환한 것이다. 이는 자기 성장을 위한 보상이며, 수동적 억제가 아닌 능동적 선택이다. 그 선택을 통해 아이는 자신의 욕구를 더 높은 가치로 승화시켰다. 그것은 내재된 창조적 힘을 경험하는 놀라운 순간이다.
편안한 길을 포기할 때 비로소 더 의미 있는 길이 열린다는 체험, 마치 연어가 거센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듯 존재의 본질을 향해 되돌아가는 여정과 같다.
우리 모두에게는 창조적 자아의 힘이 있다. 문제는 그것을 쓰려는 의지다. 매 순간, 거슬러 오르는 선택을 할 수 있느냐가 관건이다. 보상의 시대에 ‘거슬러 산다’는 것은 불편한 선택일지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나를 나답게 만드는 선택이며, 삶의 방향을 내 쪽으로 돌리는 용기다.
빠른 보상 시스템에 무작정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보상을 능동적으로 선택하는 주체가 되는 것. 이것이 바로 창조적 자아의 근육을 키우는 길일 것이다.
<영성이 묻는 안부>
우리는 어떻게 창조적 자아의 힘을 기를 수 있을까요? 첫걸음은 ‘보상 시스템’을 인식하는 일입니다. 잠들기 전 무심코 스마트폰을 집어 들 때 조용히 자신에게 묻습니다. “지금 내가 왜 이걸 하려는가?” 이 질문에 내 안의 영이 깨어납니다.
책 한 페이지 읽기나 사색이나 기도 같은 작은 선택을 통해 긍정적 보상 쪽으로 방향을 바꿔봅니다. 연어가 거센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듯 존재의 본질을 향해 나아가는 길입니다. 그곳엔 창조의 숨결과 나를 지으신 분의 시선이 기다립니다.
외적 보상으로 우리 자신을 포장하거나 도피하지 않고, 이미 받은 존귀함과 사랑을 받아들입니다. 그 사랑 안에서 열등감은 치유되고 자아는 숨을 쉽니다. 가짜 보상으로 진짜 나를 밀어내지 않고, 긍정적 보상으로 참된 나를 수용합니다.
무의식의 열등감이 외적 보상의 유혹을 불러올 때마다 그분은 묻습니다. “너 어디 있느냐?”(창세 3,9) 에덴을 향한 발걸음에서 창조적 자아가 깨어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