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복음에서 어떤 사람이 예수께 “주님,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 하고 묻습니다. 이것은 사실 많은 신앙인이 마음에 품고 있을 법한 질문입니다. 나름대로 신앙생활을 열심히 한다고는 하지만, 자신이 구원받기에 충분히 합당한지 알 수 없기에 생기는 불안을 드러내는 질문입니다. 여기서 기대하는 답은 “모든 사람 혹은 대부분 사람이 구원받는다”일 것입니다. 그러면 “아, 나도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겠구나” 하고 안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하늘나라에 들어가려면 좁은 문을 통과하도록 힘써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하늘나라를 마치 문이 달린 집처럼 묘사하고 계십니다. 이러한 부분 때문에 사람들이 하늘나라를 공간적인 개념으로 생각하게 되었지만, 사실 하늘나라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과는 다른 차원의 공간이 아니라 하느님과의 관계입니다.
아무튼 예수님께서 말씀하고자 하시는 뜻은 무엇일까요? 우리말 성경에서 ‘좁은’으로 번역한 그리스어 단어는 ‘스테로스’인데, 이 단어는 ‘한숨짓는다’, ‘신음하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즉, 좁다는 말에는 고통스럽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힘쓰다’로 번역된 단어는 ‘아고니조마이’인데, 운동선수나 전사가 경기나 전투에서 승리하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는 것을 뜻합니다. 승리에 이르기 위한 이 과정 또한 고통을 동반하죠.
사실 많은 신앙인이 신앙생활은 좁은 문을 통과하는 고통스러운 일이라는 말씀에 공감하실 것입니다. 신앙은 끊임없는 희생과 봉사, 나눔과 섬김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또, 신앙은 지속적인 용서와 화해, 낮춤과 포기를 요구합니다. 때로는 신앙 때문에 모욕과 박해를 당할 것도 각오해야 합니다. 이 모든 것은 편함과 안전함을 찾는 우리의 본능을 거스르는 일이기에 신앙생활을 하려면 고통을 겪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왜 하늘나라는 넓고 편한 문이 아니라 이렇게 좁고 고통스러운 문을 통해 들어가야 할까요? 곤충학자 찰스 코우만은 처음 애벌레가 나방이 되는 것을 관찰할 때, 고치의 작은 구멍으로 나오려 애를 쓰는 나방이 불쌍해 가위로 그 구멍을 넓혀주었습니다. 그런데 넓은 구멍으로 쉽게 나온 나방은 날지 못하고 버둥대며 기어만 다니다 결국 죽어버렸습니다. 고치의 작은 구멍을 통하지 않고서는 고치 밖 세상에 적응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좁은 문을 통하지 않고서는 하늘나라에 적응할 수 없을 것입니다. 좁은 문은 하늘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거쳐야 하는 시험이 아니라, 하늘나라의 삶의 방식을 배우는 수업이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좁은 문을 통과할 때의 고통을 하늘나라에서도 영원히 겪어야 할까요? 좁은 문의 고통은 하늘나라에 들어가면 사라질 것입니다. 좁은 문이 고통스러운 것은 그 문 자체에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라, 원죄 이후 타락한 인간 본성 탓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부활을 통해 새로 창조될 우리에게 하늘나라의 삶은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라 지극한 행복이 될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많은 사람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려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구원받을 사람이 적다는 의미일까요? 그런데 예수님은 동서남북 온 세상 사람들이 하느님 나라의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이라고도 하십니다.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는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유다인들은 아브라함의 후손으로서 자신들만이 구원의 보증을 받은 것처럼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들이 다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이방인이라 하여 하늘나라에 못 들어가는 것도 아니라는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좁은 문을 통과하는 수고를 마다치 않는 이는 누구나 하늘나라에 들게 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하늘나라를 굳이 공간적으로 이해한다 해도, 문이 좁으니 방도 작지 않을까, 하늘나라에 내가 들어갈 자리 하나가 없을까, 걱정할 필요는 없겠습니다. 외경 에즈라 2서는 하늘나라를, 좁은 문을 지나면 복되고 풍요로운 거대한 도시가 나오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제1독서인 이사야서에서 하느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모든 민족들과 언어가 다른 모든 사람들을 모으러 오리니 그들이 와서 나의 영광을 보리라.” 하늘나라는 이 모든 이가 들어갈 만큼 충분히 큽니다.
그러니 좁은 문 앞에서 좌절하지 말고 오늘 제2독서인 히브리서가 권고하듯이, ‘맥 풀린 손과 힘 빠진 무릎을 바로 세워 바른길을 달려’ 가야겠습니다.
글 _ 함원식 이사야 신부(안동교구 갈전 마티아본당 주임)